이 글엔 스포일러가 있다. 2014년 8월 펴낸 김진명 소설 ‘싸드’의 주요 내용이다. 작가는 이런 질문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하룻밤 자고 나면 미국에는 적자가, 중국에는 흑자가 쌓인다. 미국은 돈을 찍어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힘이 없어진 달러는 미국의 퇴조를 점점 가속화한다. 이대로 미국은 침몰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미국인들의 답은 도널드 트럼프였다. 폐쇄적 미국 우선주의로 전 세계 공존 생태계를 파괴하는 황소개구리를 지도자로 택했다. 그러면서 소설 속 작가의 답은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 작가는 미국이 침몰하지 않기 위해 전쟁을 필요로 한다고 결론 내린다. 그것만이 ‘강한 달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전쟁 상대는 누구인가.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 바로 북한이다. 단, 전제조건이 있다. 북한의 혈맹인 중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로부터 미국 본토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등장한 게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국 배치라는 주장이다. 소설 ‘싸드’는 주인공이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이렇게 외치는 것으로 끝난다. “싸드는 전쟁입니다.”
소설엔 이런 주장도 있다. 미국이 계산한 한반도의 전쟁 비용은 1조 달러(약 1157조 원)다. 전쟁을 이기기 전 미국이 먼저 거덜 날지 모른다. 그래서 결국 미국은 핵전쟁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예측한다. 그 증거로 전방의 미군을 모두 경기 평택으로 이전하는 계획을 꼽는다. 항구도시 평택은 핵전쟁 시 미군 철수의 최적지란 얘기다.
소설이 허구로만 느껴지지 않는 건 트럼프 행정부가 북핵 위협에 맞서 남한에 전술핵무기 재배치를 검토하고 있다는 뉴욕타임스의 4일 보도를 접해서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미 전쟁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지 모른다. 사드 배치에 무차별 보복을 가하는 중국과의 ‘경제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한반도 ‘신(新)냉전체제’의 서막이다.
이번 대선은 미국과 중국, 북한의 마초들이 벌이는 치킨게임에 운명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가장 고독한 지도자를 뽑는 선거인지 모른다. 우리의 후손들은 대통령 탄핵이란 국가 리더십 붕괴 상황에서 최악의 대외 환경에 맞서 선조들이 어떤 선택과 결단을 내렸는지 주목할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반성문인 ‘징비록’을 다시 써야 할지, 아니면 대한민국 재도약의 승전기를 쓰게 될지가 이번 대선에 달린 셈이다.
소설엔 전쟁 준비에 나선 미국 정부가 올해 한국 대선 상황을 예측한 가상의 보고서가 담겨 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의 ‘가상 보고서’는 이렇게 끝난다. ‘그는 우리(미국)에게 최악의 파트너로 보인다.’ 안타깝게도 이런 전망은 소설이 아닌 실제 상황이다. 지난달 열린 미 하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선 이런 우려가 쏟아졌다.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인 문재인 씨가 집권할 경우 대북 정책을 놓고 트럼프 행정부와 서울 간 틈새가 벌어질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고려해야 할 한반도 리스크다.”
미국이 우려하니 문 전 대표가 대통령이 돼선 안 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문 전 대표 지지층은 이런 지적을 안보상업주의, 사대주의라고 비판할 것이다. 그러면서 성조기를 휘날리는 보수 진영을 ‘청산 대상’으로 몰아갈 것이다. 이런 ‘내전 상황’에서 ‘대통령 문재인’은 어떤 선택을 할지가 궁금한 것이다. 우리 안의 적과 싸우겠다고 달려든다면 세계 마초들과의 전쟁은 백전백패다. 전투는 군인이 하지만 전쟁은 국민이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문 전 대표의 인식은 지지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는 3일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 1차 토론회에서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을 ‘적폐 세력’으로 규정했다. 지난주 한국갤럽의 정당 지지율은 한국당 12%, 바른정당 5%였다. 17%의 국민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선언인 셈이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가 전체 유권자에게 얻은 득표율은 38.9%다. 17%는 결코 소수가 아니다. 그들이 박 대통령을 지지했고, 탄핵에 반대한다고 배제한다면 외침(外侵) 앞에서 나라를 결딴내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설령 지금의 위기가 과장됐다 하더라도 이것이 대한민국의 미래여선 안 된다.
문 전 대표는 “불의에 대한 뜨거운 분노 없이 어떻게 정의를 바로 세우느냐”고 항변했다. 절반의 진실이다. 정의는 분노(과거)를 참여(미래)의 에너지로 바꿀 때 비로소 바로 선다. 참여는 영어로 ‘participation’이다. ‘part’는 ‘부분’이란 뜻이다. 모두가 전부가 아닌 부분임을 인정할 때 참여가 가능하다. 애초 권력 독점과는 상극이다.
이르면 이번 주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을 내린다. 그 순간 탄핵정국은 지나간 과거다. 미국의 사회비평가인 크리스토퍼 래시는 책 ‘진보의 착각’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진보는 진보 반대론자들과 싸웠을 뿐 결코 미래와 싸우지 않았다.’ 과거와 싸우는 지도자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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