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무차별 사드 보복은 한국을 예전의 조공 바치던 속국으로 생각하기 때문인가
대국으로 존중받으려면 ‘글로벌 룰’도 존중해야
보복에 무릎 꿇을 순 없다 국론통일-준비-인내로 장기화에 대비해야 할 것
오늘은 나도 중국 기자들에게 뒤지지 않는 ‘애국적인 기자’가 되려 한다. 중국 매체들의 한국 관련 기사나 논평은 극과 극인 경우가 많다. 한국을 치켜세우거나 깔아뭉갠다. 기준은 하나. 중국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다. 그래도 한국 언론은 중국 매체를 비판하지 않았다.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니까 어쩔 수 없으려니 했다.
그러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둘러싼 중국과 중국 매체의 오만한 태도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국과 일본 등에는 엄격한 한국 언론이 중국에는 무슨 빚을 졌기에 이리도 호의적인가. 중국이 어떤 정치체제를 유지하든, 중국 언론이 국내 문제를 어떻게 다루든 그건 중국의 선택이다. 그러나 이웃나라와 다툼이 있는 문제를 놓고 100% 자신만이 옳다고 강변하며, 힘을 앞세워 겁박하는 것까지 침묵할 수는 없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의 언론들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제국주의 정권의 나팔수가 됐다. 의심도, 검증도 하지 않았다. 한국과 중국이 최대의 피해자다.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나 전쟁이 끝난 뒤 일본 언론들은 통렬하게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부(負)의 역사’는 아직도 일본 언론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정보 유통이 클릭 한 번으로 이뤄지는 지금도 중국 언론에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중국 공산당이 바뀔 수밖에 없다. 너무 평범한 요구를, 너무 진지하게 해서 쑥스럽다. 덩치가 커진 만큼 덩칫값을 해줬으면 좋겠다. 한국은 작지만 중국의 속국이 아니다. 사드가 중국의 국익에 관한 문제라면 한국에는 국익에 더해 주권이 달려 있다. 북핵이 해결되면 사드를 철수하겠다는 약속만큼 분명한 약속이 어디 있나. 그러니 북한부터 먼저 단속해 주길 바란다. 북한에 대한 영향력에 한계가 있다고? 그럼 미국과 한국의 대북 정책에 딴지를 걸지 말라. 한국은 얻어터져도 이젠 이불 속에서 혼자 울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이 크고 잘나서가 아니다. 그런 게 글로벌 사회이며, 중국도 분명 그 일원이다.
더 ‘슬픈 일’은 따로 있다. 세계의 중심이었던 중국은 100여 년 전 서구 열강의 먹잇감이 됐고, 그 치욕을 씻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그런데 지금 중국의 모습을 보라. 그토록 미워하던 서구 열강의 탐욕을 닮아가고 있지 않은가. 힘으로는 다른 나라의 고개를 숙이게 할 수는 있으나 마음을 숙이게 할 수는 없다.
나는 사드 배치를 둘러싼 이견과 중국의 경제 보복은 명백히 분리해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드는 우리가 숙고해서 배치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나는 배치에 찬성한다). 그러나 사드를 배치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중국의 보복에는 절대로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게 주권이다.
국내도 문제다. 흔히들 우리 민족에게는 국난 극복의 DNA가 있다고 한다. 이젠 거짓말이다. 우리는 내우(內憂)에도 나라가 둘로 갈리는 현실을 매일처럼 목도하고 있다. 하물며 외환(外患)이랴. 실체 없는 DNA를 과신해서는 안 된다. 국론 통일, 준비, 인내만이 살길이다.
중국의 보복은 단순히 사드 배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차원에서는 미중의 패권 경쟁, 아시아에서는 중일 헤게모니 쟁투의 일환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한미 동맹과 한미일 공조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중국과 더불어 사는 방법도 고민하게 된다. 북핵 문제, 통일 문제도 같은 구도에 놓여 있다.
당장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중국의 보복을 견뎌내야 한다. 어떤 이는 사드 배치를 서두른 게 잘못이라고 다시 주장한다. 어떤 이는 정부가 좀 더 일찍 중국의 보복을 예측하고 대비를 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당하신 말씀인데, 이런 주장들은 ‘사드 배치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게 더 솔직하다. 중국은 사드 배치를 하면 반드시 보복을 했을 테니 서두르지 않았어도, 미리 대비를 했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중국의 관광 보복을 극복한 일본의 사례를 많이 보도한다. 전화위복은 저절로 된 게 아니다. 우리 정부는 지금 뇌사 상태이고, 관광자원과 인프라도 일본만큼 풍부하지 않으며, 일본 국민만큼 잘 참으리란 보장도 없다. 고통이 훨씬 크고 길 것이라고 각오해야 한다. 그런 현실을 솔직하게 알리고 준비를 돕는 게 정부와 오피니언 리더들의 역할일 것이다.
중국 기자들만큼 애국심을 발휘하려고 했는데, 결국은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이 더 많아졌다. 고민은 많아도 한국에서 기자 생활 하고 있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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