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미국과 국교 수립을 처음 권한 나라는? 중국이다. 1879년 북양대신 이홍장이 조선 영의정 이유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러시아의 위협을 들어 미국 영국 독일 등과의 조약 체결을 권했다. 국력이 쇠하던 중국이 서구 열강을 끌어들이는 이이제이(以夷制夷) 구상을 한 것이다. 이어 1880년 일본에 수신사로 간 김홍집에게 중국 참찬관 황준헌이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의 방책을 담은 ‘조선책략’을 전하면서 조선 조정은 ‘오랑캐’로 여겼던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적극 검토하게 된다.
▷중국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과정에선 몽니를 부렸다. 이홍장이 ‘조선은 청의 속방(屬邦)’이라는 내용을 제1조에 명문화하려 들었다. 하지만 미국의 전권특사인 로버트 슈펠트 제독이 조선은 독립국이라며 강력히 반대하며 버텨 결국 빠졌다. 슈펠트는 그해 5월 조인식 때 조선이 청의 용기(龍旗)나 이를 일부 바꾼 기를 들고 나오면 속국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국기 제정도 촉구했다. 태극기를 정식 제정하기 전이라 조선은 ‘태극도형기’를 임시로 만들어 사용했다.
▷중국의 근대 계몽사상가인 량치차오는 청일전쟁의 패배와 관련해 이홍장의 열두 가지 책임을 따졌다. 그 첫 번째는 “조선이 여러 나라와 조약을 체결하도록 잘못 권했다”라는 것이다. 당대의 선각자였던 량치차오는 서구 문명 수용을 주장해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중국의 속국이었던 조선이 외교권을 행사케 된 것은 영 못마땅해했다. 그는 조선의 망국에 “흐느껴 울며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다”고 애통해했으나 조선의 무능을 조롱하는 글도 남겼다.
▷미국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비밀 협정 후 한미 관계를 단절했다가 6·25 이후 한미동맹을 구축했다. 한 세기 전부터 우리를 자주독립국으로 인정했고 ‘대국’이라고 공공연히 협박한 적도 없다. 중국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로 고압적으로 나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익히 봐 온 그들의 민낯이다. 딴 속셈이었지만 이홍장의 권고가 결과적으론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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