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미국을 방문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회담 전 악수를 나고 있다.
미국 워싱턴 특파원 시절, 한국 특파원들이 모여 치열한 토론을 벌인 때가 있었다. ‘린치핀(Linchpin)’과 ‘코너스톤(Cornerstone)’ 중에 뭐가 더 중요한 의미냐는 것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특파원들이 영어사전까지 들춰가며 단어 의미 파악에 골몰하게 된 것은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을 ‘린치핀’, 일본을 ‘코너스톤’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 대통령이나 일본 총리와 기자회견을 할 때 오바마 전 대통령은 꼭 이 단어들을 썼다.
사전적 의미로 린치핀은 ‘핵심축’, 코너스톤은 ‘주춧돌’을 의미한다. 단어의 중요성은 오십보백보. 비슷한 무게감을 가졌다. 한국 특파원들은 “그래도 핵심축이 주춧돌보다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유리한(?) 결론을 내고 웃곤 했다.
버락 오바마 前 대통령
외교에서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중요하다. 객관적인 경제수준이나 대미 무역관계, 글로벌 영향력에서 일본이 한국보다 한수 위라는 것을 오바마 행정부가 모를 리 없지만 한국과 일본의 미묘한 역사를 고려해 거의 동급의 단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을 배려한 셈이다. 한국과 일본이 과거사 문제로 대립해 미국이 중재에 나섰을 때도 ‘린치핀-코너스톤’이라는 대등 비교는 미국 외교가에서 여전히 유효했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는 완전히 바뀌었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한중일 순방 후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중요한 파트너’, 일본은 ‘가장 중요한 동맹’”이라고 규정했다.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미국의 속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사일과 핵무기 발사를 위협하는 북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일본은 한국을 제치고 미국의 핵심 파트너가 됐다. 미중회담 전후로 트럼프 대통령은 어수선한 정국의 한국보다 일본의 의견을 청취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일본은 어느새 미국의 ‘베프(베스트 프렌드)’가 됐다.
일본은 어느 날 갑자기 미국의 절친으로 거듭난 것은 아니다. 일본은 미국이 주시하건 주시하지 않건 미국 외교무대에서 꾸준히 자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자국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활동을 해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일본에게 있어 북한이 골칫거리인 것은 단지 핵뿐이 아니다. 더 오래된 문제는 일본인 납북 피해자 송환이다. 북한이 간절히 관계정상화를 원하는 미국에서 납북자 송환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켜 북한을 압박하겠다는 일본의 외교 전략은 오래 전부터 가동되고 있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중국이 탈북자들을 강제 송환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워싱턴 주재 중국대사관 앞이 시끄러워졌다. 북한인권 단체와 한인 사회가 ‘강제 북송 중단하라’고 쓴 피켓을 들고 행진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시위 현장에 일본인들도 등장했다. 이들은 일본인 납북 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스포트라이트는 받지 못했다. 그래도 일본 납북자 문제를 설명하는 팸플릿을 열심히 돌리며 미국인들에게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했다. 한인단체들은 한바탕 시위를 벌이고 사라졌지만 일본인들은 더 오랫동안 현장에 남아 있었다.
당시 시위 현장에 있던 시마다 요이치(島田洋一) 후쿠이 현립대 교수에게 “왜 직접 관련도 없는 중국 탈북자 강제 송환 반대 시위대에 섞여 일본 납북자 시위를 벌이느냐”고 물었다. 이날 현장에 나오기 위해 일본에서 날아왔다는 그는 “인권 차원에서는 비슷한 문제다. 일본 납북자는 오래된 이슈라 관심을 끌기가 쉽지 않다. 중국 강제 송환 반대 시위대에 얹혀서라도 이슈로 만들어야 한다”고 답했다. 일본 납북자 문제에 관심이 있는 미국 의회와 정부 관계자들도 만날 것이라고 했다.
그 후 한 일본의 유력 신문 워싱턴 지사장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의 미국인 부인은 워싱턴에서 일본 납북자 구출 단체를 조직하고 미국 정계를 상대로 로비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부인은 변호사가 본업이었지만 일본 납북자 문제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기자에게 일본 납북자 역사를 장시간 설명하는 그녀를 보며 미국에서 일본 납북자 문제가 주목받고 그 해결을 위한 청문회가 열리는 이유를 알아냈다. 다름 아닌 일본계 인사들의 끊임없는 활동 덕분이었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최상의 한미관계를 일본이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에서는 이런 얘기가 나오지 않을 듯 하다. 더이상 ‘찰떡 공조’만을 외치며 미국을 믿고 있기에는 일본의 영향력이 너무 커졌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어정쩡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고차원의 외교가 필요하다.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이라는 특급 회오리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한국이 그런 외교적 역량을 발휘할 여유가 있을까. 회의적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