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종의 오비추어리] ‘꿈 전도사’로 변신한 특허 소송꾼 유진 랭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9일 10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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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빈민가의 청소년들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대학 진학을 도운 ‘특허 소송꾼’으로 유명한 기업인 유진 랭. 그가 8일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8세.

가난한 ‘흙수저’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랭은 대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특허를 보유해 큰 돈을 번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액정표시장치(LCD), 현금자동입출금기(ATM) 등 전자기기에 꼭 필요한 특허를 다량 확보했고 특허사용을 허가하는 방식으로 큰 돈을 벌었다. 자신의 특허 기술을 무단으로 사용하는 기업들에게는 소송도 불사했다. 이 때문에 랭은 산업계에선 ‘투사’로 불렸지만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꿈 전도사’로 추앙받았다. 그는 장학재단을 세워 1만8000명 이상의 저소득층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그의 도움을 받은 학생들은 대부분 흑인, 히스패닉 출신들이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모습은 소박했다. 항공기를 이용할 때는 이코노미 석을 이용했고 비싼 자가용 대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녔다.




● 자수성가한 냉혹한 특허 소송꾼


랭은 1919년 3월 헝가리, 러시아 출신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랭의 아버지 다니엘은 헝가리에서 체제 전복적인 서적을 배포하다 실형 선고를 받아 1911년 미국으로 이주해온 인물이었다. 다니엘은 뉴욕 브루클린의 조선소 노동자로 생계를 꾸렸다. 랭의 가족은 다른 세입자들과 화장실을 함께 쓰는 월 임대료 12달러짜리 아파트에 살았다.

랭은 공립학교인 타운센드해리스고교를 다닐 무렵 맨해튼 미드타운의 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당시 학비가 싼 공립대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한 단골 손님의 소개로 15세에 장학금을 받고 명문 사립대인 스와스모어대(펜실베이니아 주 소재)에 진학했다. 스와스모어대는 앰허스트대 등 미국의 9개 명문 학부 중심 대학 중 하나다. 2013년 일간지 ‘USA투데이’와 입시전문기관 ‘프린스턴리뷰’가 실시한 ‘대학가치 평가조사’에서 명문 하버드대를 제치고 사립대 부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랭은 1938년 스와스모어대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40년에는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브루클린폴리테크닉대(현 뉴욕대 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 박사 과정을 다니기도 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군에 입대해야 했으나 ‘평발’이라 면제 판정을 받았다. 대신 롱아일랜드의 항공기 부품공장에서 일했다. 평직원으로 입사해 특유의 성실함과 영민함으로 일찌감치 관리자로 승진했고 어린 나이에 공동 대주주에 올랐다. 경영진이 된 그는 1949년 회사의 사업 영역을 크게 확장했고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그는 1952년 최첨단 기술의 특허를 확보하고 하이테크 벤처 기업에 투자하는 리팩테크놀로지를 설립했다. 리팩은 액정표시장치(LCD), 현금자동입출금기(ATM), 비디오카세트리코더(VCR), 신용카드 조회 시스템, 바코드 스캐너, 카세트플레이어, 캠코더, 전자 키보드 등에 필요한 특허를 대량으로 확보했다. 리팩은 이후 무단으로 보유 특허를 사용하는 기업들에게 수천 건의 소송을 걸었다. 리팩에게 소송당한 기업은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대기업에서 대형 창업기업까지 다양했다.


● 할렘가에 등장한 ‘드림 메이커’

랭은 1981년 6월 맨해튼 이스트할렘의 한 공립학교인 호이후드초등학교에 졸업생 축사를 하러 갔다. 당시 졸업생인 6학년 학생은 모두 61명이었다.

그는 ‘50년 전 자신도 같은 학교를 다녔고 열심히 일해 큰 돈을 벌었다. 너희들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것’이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강단에 서자 이런 따분한 축사를 할 수 없었다.

랭은 “학생들은 대부분 흑인이나 히스패닉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며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의 ‘I have a dream’ 연설에 대해 말하기로 했다”고 훗날 털어 놓았다.

랭은 61명의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한다면 연간 2000달러씩 4년 동안 장학금으로 지급하겠다고 했다. 강당에는 ‘헉’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학생과 학부모, 교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용단은 큰 주목을 받았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은 그를 백악관에 초대할 정도였다.

랭은 또 “내가 그런 약속을 했을 때 호이우드초등학교 교장은 ‘한두 명 정도만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며 “장학금을 주는 것만으로는 저소득층 학생들이 성공한 인생을 살기 어렵다”고 했다.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은 대학 장학금이 보장돼도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 마약, 폭력 등에 휩쓸려 감옥에 갈 수 있다. 여학생들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랭은 포기하지 않았다. 맨해튼에 ‘I have a Dream’ 재단을 세우고 학생들을 관리할 매니저를 고용했다. 모든 학생들에게 멘터를 붙여주며 개인 지도까지 했다. 61명 가운데 52명이 뉴욕에 남아 그의 후원을 받았고 30명 넘게 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6학년 학생들에게 투자하는 게 시기상 너무 늦다는 것을 알게 됐고 3, 4학년부터 후원하기 시작했다. 랭은 자신의 후원을 받은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일자리까지 소개했다.




● 기부로 마친 여생

랭의 재단은 30여 년 동안 1만8000명이 넘는 저소득층 학생들을 초등학교 3학년부터 연결해 장기간 관리하며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저소득층 학생들은 통상 9% 정도만이 학사 학위를 받는다. 하지만 이 재단의 후원을 받으면 3배 이상으로 대학 진학률이 올라간다. 랭은 뉴욕의 다른 부자들에게 후원하도록 설득했다. 랭의 설득에 감명을 받은 월스트리트의 투자 은행가 조지프 라익은 1992년 브루클린에 초등학교를 세웠고 이 학교는 미국의 차터스쿨(대안학교 성격의 공립학교)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 중 하나가 됐다.

랭은 장학재단 뿐만 아니라 교육기관에도 많이 기부했다. 모교인 스와스모어대에 5000만 달러(약 570억 원)를 기부를 했고 뉴스쿨대에 자신의 이름을 딴 인문학 중심 단과대학인 유진랭대에 2000만 달러(약 228억 원)를 기부했다.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의 유진랭 기업가정신센터에도 기부금을 남겼다. 그의 기부금을 모두 더하면 1억5000만 달러(약 1710억 원)에 달한다. 랭은 생전에 스와스모어대 재단 이사장,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협회 이사, 서클인더스퀘어씨어터(브로드웨이의 극장) 회장 등도 지냈다. 2남 1녀를 뒀으며 막내 아들은 영화 ‘아바타’ 시리즈에 출연한 배우 스티븐 랭이다. 랭의 꿈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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