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판 위에서 자글자글 녹아 걸쭉해진 치즈에 양념이 잘 밴 닭갈비를 굴려 입에 넣은 고교 1학년생 와카 양(15)이 탄성을 지른다. “앗, 뜨거”를 연발하면서도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그러더니 생각났다는 듯 휴대전화를 꺼내 철판과 자신이 함께 나오도록 셀카를 찍는다. 치즈를 묻힌 닭갈비가 걸쭉하게 늘어나는 장면은 인증 샷의 기본이다.
12일 오후 일본 도쿄 코리아타운 신오쿠보(新大久保)의 ‘시장닭갈비’집. 사이타마(埼玉) 현에 사는 와카 양은 이날 방과 후 40분간 전철을 타고 친구 유이 양(15)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치즈닭갈비를 직접 맛보기 위해서다. 신오쿠보에 처음 왔다는 그는 “학교 친구들 절반 정도는 이 집에서 치즈닭갈비를 먹는 모습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하지만 한국에 대해선 별로 아는 게 없다”고 말했다.
한구석에 친구 2명과 함께 자리를 잡은 모리시마 리사 씨(18)는 가나가와(神奈川) 현의 대학 신입생이다. 매일같이 인스타그램에 오르는 치즈닭갈비 영상을 보다 못해 며칠을 별러 찾아왔다. 1시간 거리. 역시 신오쿠보는 처음이다. 닭갈비에 치즈를 묻혀 들어올리면서 “촬영해도 된다”며 포즈를 취해 줬다. 자신도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열심히 셀카를 찍었다. 그는 “주위에 (한국 치즈닭갈비) 입소문이 많이 나서 궁금했다”며 “이런 걸 먹지 못하면 친구들 대화에 끼기 어렵다”고 말했다.
“요즘 한일관계가 좋지 않은 편인데 코리아타운까지 오는 게 망설여지지는 않았느냐”고 묻자 리사 씨 옆에서 부지런히 닭갈비를 뜯던 니시카와 미카 씨(18)가 딱 잘라 말했다. “맛있는 건 맛있는 거고, 한일관계는 한일관계죠. 우린 정치에 관심 없어요.”
“치즈닭갈비, 한 번은 먹어 봐야…” 10대들 수도권에서도 몰려와
신오쿠보는 일본 내 대표적인 코리아타운이다. JR신오쿠보역 개찰구를 나와 오른쪽으로 한류백화점, 명동김밥, 호식이치킨, 굽네치킨, 동막골, 엄니식당, 서울본가 등 익숙한 간판들이 4차로를 끼고 줄을 잇는다. 한류 화장품 전문점인 총각네, 명동코스메, 한류 상품 판매점인 ‘필 코리아’ 등도 있다.
1년 전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한 뒤 가 본 신오쿠보는 썰렁했다. 이곳 한인 상권은 2012년 하반기부터 불어닥친 ‘혐한 바람’에 손님이 확 줄면서 한숨을 쉬어야 했다. 2013년 284곳이던 음식점 중 100여 곳이 문을 닫았다.
그런데 4월 초 점심때 우연히 들렀던 신오쿠보는 활기가 넘쳤다. 거리로 창문을 내고 즉석호떡을 구워 파는 ‘종로호떡’집은 말 그대로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바빴다. 인근에서 ‘판교냉면’을 운영하는 차종일 사장은 기자에게 “올 초부터 갑자기 일본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치즈닭갈비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 원조는 ‘시장닭갈비’라고 했다. 차 사장은 “지금은 인근 모든 한국계 음식점이 치즈닭갈비를 메뉴판에 올렸다”며 “신오쿠보 전체 매출이 부쩍 늘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침체됐던 상권이 메뉴 하나로 살아난다니? 그것도 한일관계가 이토록 냉엄한 시국에?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2014년 초 한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중국에 방영되면서 치맥(치킨+맥주) 열풍이 일어났다. 하지만 최근 일본에선 치즈닭갈비가 등장하는 한류 드라마가 방영된 적이 없지 않은가? 궁금증을 풀기 위해 12일부터 사흘간 매일 신오쿠보에 갔다.
확실히 거리 풍경은 변해 있다. 과거에는 한류 팬인 중년 여성이 많이 눈에 띄었다면 요즘 신오쿠보 거리는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거리 곳곳에 ‘치즈닭갈비’ 선전 간판이 눈에 띄고 길거리에 나와 손님을 부르는 광경도 여기저기서 보였다.
원조라는 ‘시장닭갈비’부터 가 봤다. ‘(입장하기까지) 지금부터 120분’이라 적힌 안내판 아래쪽에 손님들이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고 있었다. 가게 안은 온통 10대 후반∼20대의 젊은이들이다.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1시간째 기다리고 있다는 한 여성 고객은 기자에게 “주말이나 방학 시즌에는 240분(4시간) 이상 기다리는 게 예사였다”며 “4월 개학 뒤에는 한숨 돌린 셈”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모이니… 주변 상권도 윤기
한국 음식인 치즈닭갈비가 일본에서 왜 이렇게 인기를 끄는 걸까. 가게를 운영하는 ‘해피 엔터프라이즈’ 조경채 사장도 똑떨어지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지난해 말부터인 것 같습니다. SNS 인스타그램에서 반응이 엄청나다고 들었고, 최근엔 일본 TV 방송들이 몇 번 찍으러 왔어요. ‘줄서서 먹는 맛집’이라고요.”
시장닭갈비 간판을 내건 것은 지난해 6월. 본격 영업은 9월부터 시작했다. 닭갈비 양념을 직접 개발했다는 강광식 부장은 “3개월간 오가는 사람들에게 시식시키며 일본인에게 가장 적합한 양념 배합을 만들어 냈다”며 “처음엔 일반 치즈를 썼는데, 짜고 잘 늘어나지 않아 지금은 모차렐라치즈와 체더치즈를 절반씩 쓰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 치즈 닭갈비’를 치면 일반인이 올린 인증 샷이 5만 건 이상 나온다. ‘시장닭갈비’ 집은 일본 음식점 전문 사이트인 ‘구루나비’의 2월과 3월 단일 음식점 조회 수 1위에 등극했다.
손님들이 장사진을 치자 지난해 12월부터 입구에 ‘지금부터 ○○분’이라는 안내문을 내걸고 대기자 명단에 이름과 연락처를 적게 했다. 인터넷에는 “라스트 오더(오후 10시 45분) 10분 전에 가면 들어갈 수 있다”는 등의 ‘꿀팁’도 돌아다닌다.
정말 어느 한 집이 ‘대박’난 데서 끝나는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지난달 하순 JR 신오쿠보역 역장이 제복 차림으로 시장닭갈비를 찾아왔다. 인사를 왔다고 밝힌 역장은 “전국 JR역 가운데 JR 신오쿠보역이 연간 승객 증가율 1위를 했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부가가치가 생기기 마련. 주변의 한류 슈퍼, 한국 화장품점 등도 덩달아 손님이 몰리고 있다.
‘끼리끼리’ 매체 활용한 젊은이들이 새로운 관계성을 만든다
신오쿠보의 한인 상권은 한일관계의 부침에 따라 출렁거렸다. 재미있는 것은 이번 치즈닭갈비 열풍은 이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 부산 총영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설치된 뒤 1월 일본 정부가 주한 일본대사를 소환하는 등 사실상 한일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 치즈닭갈비 ‘대박’이 터졌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세상 여론과 무관하게 개성을 좇는 일본 청년 문화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의 젊은 층은 TV도 잘 안 보고 정치에도 관심이 없다. 정보 유통 경로가 매스미디어가 아니고 ‘끼리끼리’ 공유되는 SNS라는 점도 특징이다. 이들은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기 위해, 호기심을 자극받아서 그리고 자신도 인증 샷을 올리기 위해 움직인다. 치즈가 쭉 늘어나는 비주얼의 치즈닭갈비는 그런 점에서 젊은 층의 SNS에 적합한 메뉴다.
치즈닭갈비는 2인분 이상부터 주문할 수 있다. 취재 3일 차에 드디어 동료를 구해 저녁 시간에 같이 갔다. 왼쪽에는 고1, 오른쪽엔 고3 여학생들이 앉아 있다.
고교 3학년생 고세키 리나 양(17)은 2년 전부터 ‘아직 뜨지 못한’ K팝 그룹의 열혈 팬. 일본어를 못 하는 가수를 위해 자신이 한국어를 공부했다고 자랑한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이 있는 시즌에는 신오쿠보의 공연장에 주 2회 정도는 오고, 1회 입장료 3000엔을 대기 위해 평소 야키니쿠(쇠고기 구이)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런 그의 얘기는 미래의 좀 다른 한일관계를 그려 보게 한다.
“그간 한국 관련 보도가 너무 부정적인 것 일색이라 마음이 안 좋았어요. 하지만 지금 일본 여고생들 사이에서는 사진 찍을 때 트와이스(일본인 3명이 포함된 한국의 9인조 걸그룹)의 ‘TT포즈’가 대유행이에요. 한국에서 유행했다는 ‘손가락 하트’도 마찬가지고요. 한국은 이웃 나라고, 멋진 사람이 너무 많아요. 한국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한국 관련 직업을 갖는 게 제 꿈이에요.”
한국 대중문화 저널리스트인 후루야 마사유키(古家正亨) 씨는 “한국도 일본도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가치관과는 다른 관점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며 “이들이 열어 나갈 미래 한일관계는 지금과 다를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