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종의 오비추어리] 만년 약체 구단 최다 우승팀으로 이끈 구단주 댄 루니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26일 12시 00분


수퍼볼 우승컵을 거머쥔 댄 루니. 출처=피츠버그 스틸러스 웹사이트
수퍼볼 우승컵을 거머쥔 댄 루니. 출처=피츠버그 스틸러스 웹사이트
피츠버그 스틸러스 구단주 댄 루니. 출처=피츠버그 스틸러스 웹사이트
피츠버그 스틸러스 구단주 댄 루니. 출처=피츠버그 스틸러스 웹사이트
미국 프로미식축구리그(NFL)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구단주 댄 루니가 13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루니는 구단 창업주인 아버지 아더에게 팀을 넘겨받아 2번이나 슈퍼볼 우승을 일구며 ‘스틸러스의 황금시대’를 일궈낸 가장 성공한 스포츠 경영인 중 한 명이다.

스틸러스는 루니가 합류한 뒤 1972년부터 올해까지 디비전(지구) 우승 15번, 아메리칸풋볼콘퍼런스(AFC) 우승 8번을 차지했다. AFC는 내셔널 풋볼 콘퍼런스(NFC)와 함께 NFL를 구성하는 양대 콘퍼런스 중 하나다. 스틸러스는 양대 콘퍼런스 우승팀이 겨루는 슈퍼볼(챔피언 결정전)에서 NFL 32개 구단 중 최다인 6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강팀. 루니는 반세기 동안 NFL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 받아 2000년 오하이오 주 캔턴에 마련된 NFL 명예의 전당(1962년 설립)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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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날 때부터 ‘영원한 스틸러스’

루니는 1845~50년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감자 대기근을 피해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 정착한 이민자 집안의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 아더(1901년 출생)는 조지타운대 체육 장학생에 뽑힐 정도로 스포츠를 매우 사랑한 인물이었다. 대학 졸업 후 권투, 야구,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하다 1920년대 피츠버그에서 활동하던 준프로 미식축구 구단인 마제스틱 라디오(호프 하비라는 이름으로 1921년 설립)에 합류했다. 선수 겸 코치, 스카우터의 역할을 하다 1920년대 후반 아예 구단을 인수했다.

1930년대 초반에도 미식축구는 피츠버그에서 큰 인기를 누리진 않았다. 하지만 아더는 미식축구의 성장 잠재력을 간파하고 1933년 2500달러의 가입비를 내고 마제스틱 라디오를 NFL 소속 구단에 등록했다. NFL에 가입하면서 구단 이름은 피츠버그 파이러츠(1940년 피츠버그 스틸러스로 개명)로 바꿨다.

당시 NFL의 사정은 열악했다. 1929년 발생한 대공황 이후 구단들이 별다른 수익을 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생존 자체를 위협 받아야 했다.

댄 루니와 피츠버그 스틸러스 선수들. 출처=피츠버그 스틸러스 웹사이트
댄 루니와 피츠버그 스틸러스 선수들. 출처=피츠버그 스틸러스 웹사이트
1932년 7월 태어난 루니는 스틸러스와 함께 성장했다. 9세 때 이미 라커룸(선수 탈의실)에서 허드렛일을 맡는 워터보이가 됐다. 라커룸을 청소하거나 선수 헬멧에 페인트를 칠하기도 했다. 루니는 “라커룸에 있는 것 자체가 늘 즐거웠다. 시키는 일은 뭐든지 했고 스틸러스 선수들과 함께 빈둥거리기도 했다. 나는 스틸러였다”고 회상했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루니는 한 때 성직자의 길을 고민했다. 하지만 고교(피츠버그 노스가톨릭고교) 시절 이미 미식축구팀에서 쿼터백(공격팀의 일원) 선수로 경기장을 누볐다. 듀케인대에서 회계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은 뒤 1960년부터 본격적으로 구단 일을 맡았다. 처음 맡은 역할은 인사 담당 이사였다.

아버지 아더가 이끌던 스틸러스의 성적은 오랫동안 좋지 못했다. 1947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게 최대 성적이었다. 루니는 열린 마음으로 실용적이며 효율적인 경영을 추구했다. 일단 유능한 선수 발굴에 주력했다. 스포츠 전문가인 빌 넌 피츠버그 쿠리어 스포츠 담당 편집장의 조언을 경청했고 1967년 NFL에서 처음으로 흑인 임원을 고용해 흑인들이 주로 다니는 대학에서 경기력이 우수한 흑인 선수를 발굴했다. 스틸러스는 1960년대 후반부터 팀 성적이 오르며 1972년 디비전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1974년에는 팀이 소속된 AFC에서 우승컵과 수퍼볼 우승을 거머쥐었다. 1975년 구단 사장에 취임한 루니는 이후 5번이나 더 롬바르디컵(수퍼볼 우승컵)을 차지했다. 1988년 아버지 아더가 세상을 뜨자 루니는 팀을 완전히 넘겨 받았다.



● 탁월한 갈등 중재자

1970~80년대 NFL에서는 선수와 구단 경영진 사이에는 임금 등의 문제로 갈등이 잦았다. 루니는 다른 구단주들과는 달리 별다른 이견 없이 사안을 조율하며 무난하게 노동 문제를 해결한 탁월한 경영인이었다. 1982년 그는 시즌 절반이나 파업으로 이끌었던 단체교섭 협상을 선수, 구단주 모두에게 신뢰를 얻으며 합의를 도출시켰다.

루니는 NFL의 핵심 축이었다. 1920년 오하이오주 캔턴에서 미국프로미식축구협회로 출발한 NFL은 현재 32개 구단이 가입돼 있으며 가장 인기가 높은 프로 스포츠리그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1930~40년대에는 어메리칸풋볼리그, 전미풋볼콘퍼런스 등 경쟁 미식축구 리그가 등장했다. NFL은 1950년대에서야 북미에서 독점적인 프로 미식축구리그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기간도 길지 않았다. 1960년 NFL 가입이 거절된 구단주들과 NFL 구단의 소수 주주들이 아메리칸풋볼리그(AFL)를 만들었다. NFL은 또 다시 강한 도전을 받았다. 루니는 1970년 AFL이 NFL에 통합돼 26개 구단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해냈다. 1993년 NFL 소속 구단이 선수에게 지불할 수 있는 연봉총액의 상한을 설정한 ‘샐러리캡’을 설계한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루니는 오랫동안 진보적인 정책의 지지자였다. 그는 NFL 사상 처음으로 흑인 임원을 고용했을 뿐만 아니라 소수인종을 배려한 ‘루니 룰’을 만든 주인공이다. 2002년 토니 던지 탬파베이 버캐니어스 감독과 데니스 그린 미네소타 바이킹스 감독이 해임됐다. 두 사람이 좋은 성적을 내고도 해임되자 논란이 일었다. 던지와 그린은 공교롭게도 흑인 감독이었다. 인권센터에서는 구단들이 흑인 감독을 백인 감독 보다 쉽게 해임하고 임용 자체를 기피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통계를 들며 명백한 인종 차별이라고 반발했다.

루니는 다른 구단주들을 설득해 구단들이 감독을 새로 영입할 때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소수계를 후보군에 넣어야 하는 ‘루니 룰’을 만들었다. 루니 룰이 시행된 뒤 NFL에서 흑인 감독은 6%에서 22%로 껑충 뛰었다. 피츠버그 스틸러스는 2007년 흑인인 마이크 톰린을 감독으로 선임했다.

아일랜드 주재 대사 임용 선서하는 댄 루니. 출처=피츠버그 스틸러스 웹사이트
아일랜드 주재 대사 임용 선서하는 댄 루니. 출처=피츠버그 스틸러스 웹사이트
● 말년에는 열정적인 아일랜드 주재 미국 대사로


2009년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루니를 아일랜드 주재 미국 대사로 임명했다. 평생 공화당원이었던 루니는 2008년 1월 당시 오바마의 아이오와 코커스 승리연설을 보고 오바마의 지지자가 됐다. 이후 루니는 오바마가 대선에서 중요한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를 누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루니를 대사로 지명하면서 “아일랜드의 평화, 문화, 교육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자였다”고 밝혔다.

루니는 아일랜드 이민자 후손답게 1970년대 아일랜드의 평화와 통합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아일랜드 펀드’를 공동 설립했다. 이 펀드는 3억 달러(약 3378억 원) 이상을 아일랜드 평화와 발전을 위해 투자했다.

댄 루니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출처= 피츠버그 스틸러스 웹사이트
댄 루니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출처= 피츠버그 스틸러스 웹사이트
루니는 70대 후반의 나이에 외교관으로 변신할 정도로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대사 임기를 마친 2012년까지 아일랜드의 32개 카운티를 모두 방문했다. 과거 32개 카운티를 모두 방문한 미국 대사는 없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루니가 별세하자 “고인은 내 친구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피츠버그 시민들의 친구였으며, 모범 시민이자 미국을 위엄있고 명예롭게 세계 무대에 소개한 인물이었다”고 애도했다.

이유종기자 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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