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미일중러 4강과 유럽연합(EU)에 보낼 특사단에 “피플 파워를 통해 출범한 정부라는 의미를 강조해 달라”며 “특히 이제는 정치적 정당성과 투명성이 굉장히 중요하게 됐음을 알려 달라”고 주문했다. ‘촛불 민심’이 이끌어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에 따라 들어선 정부인 만큼 외교안보 정책에서도 민심을 중요하게 고려하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당장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는 국회 비준을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한일 위안부 합의는 부정적 여론이 적지 않은 만큼 재검토할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외교안보 사령탑인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1, 2차장, 외교·통일·국방부 장관 등을 아직 인선하지 못한 상태다. 조각(組閣)은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와 협의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문 대통령이 한미 관계를 중시하는 ‘동맹파’와 균형 외교를 추구하는 ‘자주파’ 사이에서 고심하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특사단에 ‘피플 파워’를 언급한 것이 노무현 정부 ‘자주파’ 출신들의 중용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는다. 실제로 미국 특사단의 박선원 전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중국 특사단의 서주석 전 통일외교안보정책수석비서관 등은 자주파로 분류된다. 특히 문재인 선대위 안보상황단 부단장 출신인 박 씨는 1월 더불어민주당의 ‘사드 방중단’을 기획해 의원 7명과 베이징에 다녀올 만큼 문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동맹파’와 ‘자주파’는 이라크 추가 파병, 주한미군 용산기지 이전 협상, 전시작전권 전환 등을 놓고 사사건건 충돌했다. “반미면 좀 어떠냐”던 노 전 대통령이 ‘동북아 균형자론’을 꺼내자 미국에선 “한국이 동맹에서 이탈하려고 하느냐”는 격앙된 반응이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개시하고, 이라크에 자이툰 부대를 추가 파병했지만 그 시절 한미 관계는 ‘최악’이라는 평가가 과장이 아닐 만큼 위태로웠다. 문 대통령이 운동권 시각의 자주파 출신들에게 휘둘려 다시 미국과 각을 세우려 한다면 ‘노무현 시즌 2’를 넘어 나라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6월 말 워싱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갖는다. 북핵 공조를 다지고 트럼프 대통령이 내밀 사드 비용 청구서, 한미 FTA 재협상 요구에 대해서도 당당히 논의해야 한다. 중국이 사드 철회를 노리고 문 대통령에게 호의적으로 나오지만 결코 동맹인 미국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사드 보복을 보며 많은 국민이 절감했다. 든든한 한미 동맹을 토대로 중국 등과의 이해를 조율해 나가는 것이 노무현 정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는 길이다. 문 대통령이 말한 ‘국익 중심 맞춤형 협력 외교’가 노무현 자주외교의 재판(再版)이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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