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극인의 오늘과 내일]실리외교로 트럼프에 되치기 한 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17일 03시 00분


배극인 산업부장
배극인 산업부장
요즘 일본 경제의 질주는 놀랍다. 지난해 경상수지는 9년 만의 대규모 흑자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인 리먼 쇼크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전국 대부분의 원자력 발전소를 멈춰 세운 가운데 거둔 성적표다. 실업률은 22년 만에 2%대로 떨어졌고 구직인원 대비 구인인원 비율인 유효구인배율은 3월 1.45배로 25년 만의 최고치다. 언제 ‘잃어버린 20년’을 겪기나 했나 싶을 정도다.

부활의 엔진은 아베 신조 총리의 경제 정책인 ‘아베노믹스’다. 대규모 양적완화와 재정투입, 성장전략 등 ‘3개의 화살’을 내세우지만 본질을 뜯어보면 결국 무제한 돈 풀기를 통한 환율 정책이다. 아베 총리는 2012년 총선에서 압승하자 “일본중앙은행의 윤전기를 쌩쌩 돌려 엔화를 마구 찍어 내겠다”며 노골적으로 엔화 약세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엔화 강세로 신음하던 일본 제조업은 반색했고 주가는 치솟았다.

자동차, 전자, 철강 등 세계 시장 곳곳에서 일본과 경합하는 한국이 ‘이웃 나라 거지 만들기 정책’이라고 비판하자 일본은 “한국도 하면 될 것 아니냐”고 받아쳤다. 하지만 한국은 그럴 수 없었다. “원화 가치가 흔들리면 외환위기 상황이 재연될 두려움이 있다”는 게 점심 자리에서 만난 한국은행 간부의 설명이었다.

이명박 정권 때는 반대였다. ‘환율 주권론자’로 불리던 강만수-최중경 1기 경제팀 주도 아래 원화 약세의 혜택을 단단히 봤다.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비약적 도약을 한 시기로 일본은 보고 있다. 반면 일본은 액정표시장치(LCD) 패널 등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던 전자 산업이 엔화 강세와 수요 부진이 겹치며 몰락했다. 한국과 미국은 밀월 관계였고 민주당 정권이 집권한 일본은 미국과 삐걱거리던 시기였다.

당시에도 한국의 환율정책 리스크는 컸다. 리먼 쇼크가 터지자 파이낸셜타임스 등 외신은 연일 한국에 제2의 외환위기 발생 가능성을 부추겼다. 정부는 한동안 원화가치 방어에 목을 매야 했다. 한국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기축통화국인 미국 덕분이었다. 위기 발생 45일 만에 3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가 개설되면서 시장의 불안은 급격하게 사라졌다.

이 모든 과정을 목격하고 2012년 말 재집권에 성공한 아베 총리는 절치부심했다. 2013년 2월 첫 방미 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홀대에도 “미일동맹이 돌아왔다”고 호소했다. 미국의 재정적자로 인한 방위공백 ‘백기사’를 자처하며 오바마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마침내 2015년 4월 일본 총리의 사상 첫 미 상하원 합동 연설을 성사시켰다. 일본 정부는 “뒷문으로 들어갔다 이제 현관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바마 정권은 대가로 엔화 약세를 용인했다. 국제회의에서 독일, 영국, 국제통화기금(IMF)이 일본을 대놓고 비판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에도 아베 총리의 대응은 기민했다. 노골적인 통상 압력과 환율조작국 지정 위협에 트럼프 대통령을 취임 전부터 만나 밀월 관계 구축에 성공했다. 트럼프 진영의 일본 견제는 급격히 무뎌졌다. 기축통화국과의 동맹 강화를 통한 경제 실리 챙기기는 미국을 등에 업은 일본 군사대국화 이면의 진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 한국에 공세적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통보했고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비용 10억 달러를 부담하라고 요구했다. 다음 달 미국을 방문하는 문재인 대통령은 아베노믹스의 인내와 지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되치기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결국 경제는 정치하기 나름이다.
 
배극인 산업부장 bae2150@donga.com
#실리외교#도널드 트럼프#아베노믹스#한미 자유무역협정 재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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