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중국의 프로 바둑기사 커제 9단이 25일 ‘알파고’와의 승부에서 패한 뒤 지은 웃음은 마치 ‘졌다 졌어’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이세돌 9단의 패배 당시 그는 “내가 뒀으면 이겼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결과는 역시나 패배였습니다.
최소한 바둑에서 인공지능(AI)이 인간을 넘어섰다는 점은 이제 명백합니다. 하지만 이를 ‘인간의 패배’로 단정하며 우울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을 넘어선 AI를 만든 것 자체도 인간입니다. 알파고를 만든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 최고경영자(CEO)가 스스로 지적했듯, 알파고에 ‘바둑에서 이겨라’라는 목표를 입력하는 것도 인간 자신이죠.
알파고 덕분에 바둑에 대한 연구는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를 맞았습니다. 그 전까지 ‘악수(惡手)’로 평가받던 수들이 재평가되면서 바둑을 보는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아마 AI가 적용되는 분야마다 이런 일들이 발생할 겁니다.
그런데 정작 바둑 강국인 한국에 이렇다 할 바둑 AI가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앞으로는 바둑에서 인간 대 AI뿐만 아니라 AI 대 AI의 대결이 더 큰 관심을 끌 텐데요. 어느 나라, 어느 회사의 AI가 실력이 더 좋은지를 겨루는 셈이고, 이는 지금 바둑기사들의 경기만큼이나 국가 간 자존심 대결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런 무대에서 중국의 줴이(絶藝), 일본의 딥젠고에 대항할 한국의 AI가 없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닐까요. 국산 ‘돌바람’이 있긴 하지만 줴이나 딥젠고에 비해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이미 남들이 다 개발한 바둑 AI 개발해서 뭐 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번 ‘바둑의 미래 서밋’에서 허사비스 CEO가 밝혔듯 알파고가 바둑 외에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범용 AI’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근시안적인 시각입니다. 이번에 커제와 대결한 업그레이드된 ‘알파고 2.0’은 인간의 기보 없이도 스스로 대국을 두면서 학습한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인간이 데이터를 주지 않아도 학습했다는 특징은 바둑 이외의 분야에서도 활용할 여지가 큽니다. 이전 알파고에 비해 전력소비량을 크게 줄인 것도 다른 분야 AI 개발의 노하우가 될 수 있습니다.
다행히 한국에서도 ‘돌바람’을 뛰어넘는 바둑 AI를 만들려는 연구자들이 있고, 카카오의 AI 자회사 ‘카카오브레인’이 이달 한국기원과 바둑 딥러닝 연구에 협력하기로 하는 등 관련 움직임이 일고는 있습니다. 국산 AI가 국제 바둑대회에서 우승하는 날이 오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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