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 있다. 우리는 공공행사의 국민의례 때나 이 맹세를 외지만 미국 공립학교 학생들은 매일 수업 시작 전에 “나는 미합중국 국기와 … 충성을 맹세합니다”라는 맹세를 암송한다. 위헌 논란 탓에 ‘자발적’이라곤 하지만 미국 대부분 학교에서 여전히 준수되는 의식이다.
▷지배자에 대한 충성맹세는 고대부터 관습법으로 대략 12세 이상 모든 사람에게 요구해 왔다고 한다. 배신자나 불충세력을 가려내기 위한 일종의 끊임없는 테스트였다. 중세 봉건시대에 가신이 주군 앞에 무릎을 꿇고 다짐하는 충성서약도, 야쿠자 같은 조직폭력배에서 한 잔의 술을 나눠 마시거나 심지어 손가락까지 자르는 광적인 의식도 결국 주군이나 보스에 대한 배신을 막는 데 목적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로 표현되는 충성의 대상은 국기가 상징하는 국가와 국민, 나아가 국가 이념이다.
▷“나는 충성(loyalty)을 원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직후 백악관에서 제임스 코미 당시 연방수사국(FBI) 국장에게 러시아 내통 의혹 사건의 수사를 중단하라며 사실상 충성맹세를 요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코미의 답은 이랬다. “대통령은 저로부터 항상 정직함(honesty)을 얻을 겁니다.” 트럼프 개인의 사복(私僕)이 아닌, 대통령에 대한 공복(公僕)으로서 나름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거듭 ‘정직한 충성’을 요구했다고 코미는 증언했다.
▷새로 집권한 통치자라면, 그것도 공직 경험이 없는 부동산 재벌 출신 대통령이라면 충성맹세를 요구하는 게 전혀 무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정(司正)기관의 수장이라면 그 권력의 줄을 덥석 잡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코미는 국가가 아닌 권력자에 대한 ‘위험한 충성’을 거부했다. 물론 그 뒤엔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FBI 독립의 오랜 역사가 든든한 버팀목으로 받쳐줬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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