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총선에서 재앙과 같은 성적표를 받아 든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9일(현지 시간) 오후 총리 집무실인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지금 나라(영국)에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확실성이다. 내가 이끄는 정부는 공평함과 기회를 최대한 제공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과반 의석 달성에 실패한 보수당 안팎에서는 메이 총리 사퇴 여론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발 빠르게 10석을 얻은 북아일랜드 연방정부 정당인 민주연합당(DUP)의 지지하에 소수 정부를 구성하기로 하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정부 구성권에 대한 재가를 받아 거취에 급한 불은 껐다. 그러나 영국의 ‘헝 의회(hung parliament·과반 의석을 점유한 정당이 없는 의회) 시대 출범에 따라 19일 시작되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협상은 앞날을 예측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총선에서 선전한 야당은 EU와 단일 시장을 유지하는 ‘소프트 브렉시트’를, 여당인 보수당 강경파는 이민자를 제한하는 ‘하드 브렉시트’를 요구하고 있어 영국 정치권 내부 교통정리에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당장 상당수의 장관 교체가 불가피하다.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은 “선거 결과가 협상에 영향이 없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당장 미셸 바르니에 EU 브렉시트 협상 대표는 9일 “협상은 영국이 준비됐을 때 시작해야 한다”며 협상 연기를 시사했다. 기 베르호프스타트 EU의회 브렉시트 협상 대표는 “그러잖아도 복잡한 협상이 더 복잡하게 꼬일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블룸버그통신은 7일 ‘헝 의회’ 결과가 나오는 상황을 최악의 시나리오로 제기했다.
출구조사 결과가 나온 이후 영국 언론은 “메이 총리의 도박은 실패했다”며 “그녀에게 재앙과 같은 결과”라고 보도했다. 650석 중 1석 개표를 남겨 놓은 가운데 보수당은 318석, 노동당 261석, 스코틀랜드독립당 35석, 자유민주당이 12석을 차지했다. 2015년 총선과 비교해 보수당은 12석이 줄었고 노동당은 31석이 늘었다. 지난해 공중보건부 부장관을 거친 메이 정부의 핵심 인사인 제인 엘리슨 영국 재무부 예산담당 장관은 노동당 후보에게 충격적 패배를 당했다. 2010년과 2015년 총선에서는 각각 6000표, 7938표 차로 여유롭게 당선됐다.
4월 17일 메이 총리가 스스로 조기 총선 승부수를 던질 때만 해도 영국 언론은 보수당이 전체 의석 650석 중 400석 이상 거두는 압승을 예상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은 노동당에 21%포인트나 앞서 있었다.
그러나 불과 7주 만에 상황은 드라마틱하게 반전됐다. 선거 캠페인 초반 메이 총리가 요양 노인들의 혜택 기준을 높여 사실상 혜택을 축소하는 ‘치매세’ 논란에 휩싸이면서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보수당의 지지 기반인 노인들의 지지 철회가 이어졌다.
복지 논란에 이어 세금 논란은 메이 총리의 가장 강점이던 안정적인 국정 운영에 균열을 가져왔다. 스스로는 중도표를 겨냥해 서민의 세금을 줄이겠다고 했지만 국방장관은 보수층을 겨냥해 “고소득자의 증세는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혼선을 가져왔다. 최근 3개월 사이에 3번이나 터진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의 테러와 악성코드 ‘랜섬웨어’에 국가보건의료서비스(NHS)가 무방비로 뚫리면서 ‘안보’를 중시하는 보수당의 지지층 민심 이반으로 지지율은 계속 떨어졌다.
메이 총리가 조기 총선을 선택했던 데는 당내 기반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다분했다. 그는 지난해 6월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잔류 캠페인을 벌였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물러나면서 대타로 총리직에 올랐지만 당내에서 “제 힘으로 총선을 치러보지 못한 연약한 리더십”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다. 본인의 경쟁력을 입증하기 위한 승부수는 자충수로 돌아왔다.
보수당 내에서는 이미 보리스 존슨 외교장관 대타 출격론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야3당은 총리직에서 물러나라며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당내 총리 교체나 추가 조기 총선 요구에 직면할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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