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타워링’ 참사 현장르포]가난한 이민자 임대주택 화재… 경보도 스프링클러도 작동 않고 값싼 자재 리모델링이 피해 키워
“계층간 갈등 골 커질 우려”
14일(현지 시간) 찾아간 24층 높이의 영국 런던 그렌펠타워는 아직도 간간이 연기를 내뿜으며 검게 탄 채 서 있었다. 그 옆 콘월크레센트 W11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왼편에는 깨끗하고 하얀 고급 주택단지가 가지런히 이어져 있는 반면, 히잡을 둘러쓴 중년 여성이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오른편 5층짜리 다세대주택은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낡은 회색빛이었다.
그렌펠타워가 있는 켄싱턴-첼시 자치구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핵심 국가인 영국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모여 사는 곳이다. 여러 계층이 뒤섞인 사회 통합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그 속내는 글로벌 양극화의 축소판이라는 게 주민들의 얘기였다.
영국은 상위 1%가 하위 20%보다 20배나 많은 재산을 소유할 정도로 선진국 중에도 소득 불평등이 심한 국가 중 하나다. 게다가 근로자 연평균 소득의 12배에 이르는 높은 집값은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렌펠타워는 가난한 이민자들이 주로 사는 공공 임대주택이다. 화재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알람 경보도, 스프링클러도 작동하지 않은 이번 화재가 후진국형 인재(人災)였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현지인들은 “부자 동네라면 그랬겠느냐”며 저소득층에 무심한 영국 정부와 사회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타워 입주민 네즈 씨는 영국 데일리메일 인터뷰에서 “같은 켄싱턴 지역이라도 부자들이 많이 사는 노팅힐 아파트라면 이런 사고가 발생했겠느냐”며 “지난해 리모델링 당시 건축업자가 화장실, 자재, 모든 것을 가장 싼 최악의 제품을 썼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영국 언론들은 2015년 리모델링을 하면서 외벽에 부착한 피복이 화재를 키웠다고 보도했다. 사고 당일 오전 2시 30분 간신히 건물을 탈출한 해리 씨도 CNN 인터뷰에서 플라스틱 피복이 건물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장면을 회상하며 “싸니까 그런 걸 썼을 것이다. 정부는 우리 같은 사람을 돌봐주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리모델링 과정에서 피복을 쓴 것은 영국이 안전 문제에 얼마나 둔감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는 지적도 나온다. 같은 유럽 선진국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안전 문제에 신경을 쓰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건물 외벽에 피복을 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번 사건에 대한 정부의 책임이 커질 것이란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대목이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입주자들은 피복을 사용한 것에 대해 꾸준히 우려를 제기해 왔다. 하지만 자치구는 물론이고 정부 고위관리들도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으나 묵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런던시티대의 헤더 브룩 교수(언론학)는 이날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근래 부동산 값이 폭등했지만 피해 건물을 소유한 지방정부는 저소득층에 낮은 임대료를 받아 유지 관리에 어려움을 겪어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입주자들이 해당 건물의 화재 위험성을 블로그에 올려 경고했지만 관리회사는 담당 변호사를 통해 해당 게시글 삭제를 종용했다”며 관리당국이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WP)도 “19, 20세기에서나 볼 수 있는, 지구촌의 덜 부유한 지역에서 볼 법한 통제 불능의 화염이 불타오른 것”이라며 “현재는 2017년이고, 최근에는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이번 참사가 영국 사회에 잠재해 있던 빈부 격차 갈등에 불을 붙이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수십 년째 그렌펠타워 근처에 산 슈라 씨는 기자와 만나 “(계층 간 통합을 과시하려는) 정치적인 이유로 이곳에 부자와 가난한 이들을 섞으려는 정부 정책이 있었다”며 “이번 일로 계층 간 갈등의 골이 커질 것 같다”고 우려했다.
사고가 발생하고 만 하루가 지났지만 영국 경찰은 아직 사고 원인도, 실종자 수도 발표를 못 하고 있다. 사망자는 15일 오전 현재까지 17명으로 늘었고, 부상자 80여 명 중 17명은 중태다. 생존자들은 근처 체육관이나 자선단체들이 사용하는 사무실 등을 개조해 만든 임시 수용소에서 사고 첫날밤을 보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