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SNS에서는]그렌펠의 참화, 민주주의의 불지옥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20일 03시 00분


《영국 런던 그렌펠타워 화재와 관련해 페이스북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이상헌 국제노동기구 사무차장 정책특보의 글을 소개합니다.》
 
런던 그렌펠빌딩 화재는 영국의 세월호가 되는 듯하다. 까맣게 타버린 건물은 불평등과 무력한 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은 부자 동네 뒤로 서있는 그렌펠빌딩을 찍은 사진이 나왔다. 아프지만, 놀랍진 않다.

런던 시민은 그렌펠 화재를 불지옥(inferno)이라 부른다. 단테의 신곡은 inferno로 시작한다. 시작은 사소했다. 단테의 유명한 구절, ‘거대한 화염도 사소한 불꽃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문제는 저 사소한 불꽃이 건물을 순식간에 삼키는 화염이 된 까닭이다. 런던 시민들이 묻는 질문이고, 거리에서 정의를 요구하는 까닭이다.

런던의 불지옥은 세월호와 같으면서도 미세하게 다르다. 세월호의 침몰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갑작스러웠다면, 그렌펠 화재는 서서히 진행되어 온 참사였다. 마치 단테의 지옥을 인간에게 시험해 보려는 듯이, 수많은 신호와 징후를 보내왔고 인간은 개별적으로 또는 무리 지어 반응했으나, 인간집단인 사회는 이를 간단히 무시했다. 지옥이 갑자기 오지 않음을 증거한 사건이다.

그렌펠은 1960년대에 노동자 가족을 위해 건설한 건물이다. 100년은 굳건히 버틸 수 있도록 골격을 세웠다고 했는데, 아이러니하게 이번 화재는 건물의 피와 영혼을 뺏어가고 앙상한 골격만 남겼다. 또 다른 아이러니는 최근에 건물을 살리겠다고 수리했는데 그게 사소한 불꽃을 거대한 화염으로 만든 장본인이었다는 점. 오늘날의 우리를 닮아서, 건물 수리는 안전을 보지 않고 포장에 집중했다. 그나마 포장이라는 것도 알루미늄 소재로 클래딩을 해서 외관이 반짝 빛나게 하는 것이었고, 재료비는 아꼈다. 어긋난 욕망으로 화장했다.

건물주는 빛나는 외관을 사랑했겠으나, 주민은 안전을 더 걱정했다. 특히 화재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스프링클러도 설치되지 않았고, 출입구도 하나뿐이라 걱정이었다.(…)

시민만 그런 것이 아니다. 화재 관련 전문가들은 끊임없이 그렌펠 건물의 화재를 경고했고, 정치인들의 정책 대응을 요구했다. 수많은 분석과 증거, 최근 경험을 동원해서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한탄의 소리가 높다. 분석이니 증거이니, 그런 게 무슨 소용이냐. 이렇게 죽고, 다치고, 천재지변이 나고 두 눈으로 보고서야 뒤늦게 법령을 바꾼다고 야단법석이다.

영국의 총리 테리사 메이는 화재 현장을 찾았으나, 주민을 만나지는 않았다. 그렌펠빌딩의 수리 사업이 건물 외관 가치를 높이는 것이었으니, 그녀는 의당 건물만 보면 되었다. 그녀의 정치 생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까닭이기도 하다.

주민과 전문가도 말했으나 정치는 듣지 않고, 그리하여 매일 사람들은 죽어간다. 그래서, 그렌펠의 검게 그을린 앙상한 모습은 바로 오늘날 민주주의의 지옥(inferno)이다.
#영국 런던 그렌펠타워 화재#영국의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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