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저녁 일본 도쿄(東京) 아키하바라(秋葉原)역 앞.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마이크를 잡기 전부터 시민 100여 명은 ‘내각 퇴진’ 등의 플래카드를 내걸고 “물러나라” “집에 가라”고 연호했다. 아베 총리는 흥분해 “남의 연설을 방해하는 행위를 자민당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질 수는 없다”고 외쳤다.
아베 총리와 자민당에 대한 일본 유권자들의 민심이 어떤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2012년 정권 탈환 후 승승장구하던 아베 총리는 자신과 부인이 연루된 학원 특혜 지원 스캔들로 체면을 구겼고, 일방적 국정 운영에 대한 반발 등이 겹치면서 2일 실시된 도쿄도의원 선거에서 최악의 패배를 당했다.
○ 예상된 참패, 흔들리는 아베 정권
도쿄도의원 선거는 단순한 지방선거가 아니다. 전국 민심의 선행(先行) 지표로 여겨져 정계 개편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적지 않다. 자민당은 2009년 도쿄도의원 선거에서 민주당(현 민진당)에 참패한 후 한 달 만에 민주당에 정권을 넘겨준 전례가 있다.
이번 선거에서 최악의 성적을 거둔 자민당 내부에선 당장 ‘지도부 책임론’이 불거질 것으로 전망된다. 아베 총리는 이날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 등과 도쿄 모처에서 회동을 갖고 대책을 논의했다.
특히 올해와 내년은 아베 총리 필생의 과업인 ‘개헌’을 위해 중요한 해다. 아베 총리는 내년 가을 총재선거에서 3연임을 하고 2020년까지 개헌을 완수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번 참패로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해졌다.
자민당의 참패는 예상된 것이었다. 아베 총리는 선거를 앞두고 부인 아키에(昭惠) 여사가 명예교장이었던 모리토모(森友)학원에 국유지를 헐값에 매각하고, 지인이 이사장인 가케(加計)학원의 수의학부 신설에 특혜를 줬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60%를 웃돌던 정권 지지율은 30%대까지 떨어졌다. 아베 총리는 “반성한다”며 두 번이나 머리를 숙였지만 유권자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자민당 내부 악재들도 이어졌다. 도요타 마유코(豊田眞由子) 중의원 의원이 연상의 비서에게 폭언·폭행을 일삼은 녹취 파일이 공개되면서 망신을 당했고,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방위상은 정치 중립을 규정한 자위대법을 어기고 “자위대, 방위상으로서 (지지를) 부탁한다”고 말했다가 사과하고 철회했다.
전통적으로 자민당과 손잡았던 공명당이 고이케 진영으로 돌아선 것도 자민당으로서는 뼈아픈 대목이다.
○ 고이케 “기대 이상 결과에 감동”
고이케 유리코 지사는 출구조사 결과가 나온 후 마이크 앞에서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왔다. 감동했다”고 말했다. NHK 출구조사에서 도민퍼스트회는 48∼50석을 획득할 것으로 예상됐다. 공천 후보 전원(50명)이 당선권인 최상의 결과다. 공명당(21∼23석) 등 지지세력을 포함하면 3분의 2에 육박하는 의석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7월 자민당 추천 없이 단기필마로 출마해 당선된 고이케 지사는 자신의 급여를 반으로 깎는 등 개혁적 언행으로 연예인급 인기를 얻었다. 2일 NHK 출구조사에서 고이케 지사의 도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답변이 77%에 달했다.
고이케 지사는 이번 선거에서 기존 정치권에 대한 유권자의 불만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희망의 주쿠(塾)’라는 정치인 양성소를 만들고 여기서 배출된 정치 신인을 대거 공천했다. 또 ‘의원 특권 타파’를 공약으로 내걸고 공천 후보 3분의 1을 여성으로 채웠다.
이 때문에 기성 정당과 정치인에게 실망한 국민들이 신생 정치세력에서 대안을 찾는 움직임이 미국, 유럽을 거쳐 일본에 상륙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고이케 지사는 이날 “(당장) 국정에 진출할 예정은 없다”며 총리 도전설에 선을 그었다. 안정적인 도정을 통해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때까지 기존 정치세력을 흡수하며 세력을 키워 올림픽 이후 국정에 도전할 것이란 관측이 많다.
아베 체제는 당분간 지속되겠지만 ‘아베’라는 구심점이 상당히 약해질 것으로 보인다. 자민당 내에서 아소 부총리 겸 재무상,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지방창생상 등 ‘포스트 아베’로 거론되는 이들의 경쟁이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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