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 해크니 지역 질레트 광장. 밤 12시가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노천카페와 재즈바 등에서 흘러나온 음악과 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한쪽에는 길거리 공연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분위기를 띄웠다.
광장이 있는 해크니 일대는 15년 전만 해도 각종 강력범죄의 온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파괴된 동네가 30년 넘게 방치됐고, 불법 이민자와 실업자들이 몰리면서 슬럼화됐다. 높은 범죄율 때문에 낮에도 주민들이 혼자 걸어 다니기 꺼릴 정도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런던의 명소로 탈바꿈했다.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는 밥 라피크 씨(47)는 “옛날엔 마약 중개상이나 노숙인뿐이던 광장이 이제는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는 인기 장소가 됐다”고 말했다.
○ 해크니의 변신 비결은 ‘주민 위한 도시재생’
해크니는 주민들이 1982년 해크니개발협동조합(HCD·Hackney Co-operation Development)을 만든 이후 점차 살아났다. 전쟁으로 망가진 3층 건물을 구청으로부터 100년간 1파운드(약 1540원)에 빌려 예술가를 위한 작업공간으로 리모델링한 HCD의 ‘달스턴 워크스페이스’가 이 지역 도시재생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HCD는 지자체가 소유한 건물을 시세의 50% 이하로 장기 임차한 후 이를 리모델링해 재임대하고 있다. 중앙정부는 주민협동조합이 지자체 건물을 우선적으로 거래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해 지원했다.
25년째 이어온 HCD의 원칙은 ‘해크니 주민을 위한 도시재생’이다. 이를 위해 HCD는 임대료를 주변 시세의 70%만 받고 있다. 지역 주민이 운영하는 점포나 예술가, 사회적 기업 등에 임차 우선권을 준다. 무료 일자리 교육을 해주거나 해크니 광장에서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를 열기도 한다. HCD에 가입한 지역 주민들이 이 모든 과정에 참여한다. 예술가와 갤러리, 스타트업 등이 모여든 해크니는 2012년 런던 올림픽 폐회 행사 장소로 선정되는 등 명실상부한 런던의 ‘핫 플레이스’가 됐다.
이날 런던 사무실에서 만난 에드워드 퀴글리 HCD 대표는 “주민들이 꾸준히 도시재생에 참여하다 보니 이제 동네 스스로 자생력을 갖추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HCD와 같은 일을 하는 사회적 기업은 4곳으로 늘었다. 이들은 해크니 일대의 젠트리피케이션(높은 임대료를 견디지 못한 원주민이 주변으로 밀려나는 현상)을 막기 위해 임차인 모집, 적정 임대료 조사 등을 함께하고 있다.
○ 친환경 서민 임대주택단지로 재탄생한 그리니치 반도
2000년대 들어 영국 정부는 전국 곳곳에 ‘밀레니엄 빌리지’ 조성 사업을 추진해왔다. 주로 도심 인근에 버려지거나 방치된 땅을 활용하는 일종의 주거타운이다. 신도시 사업의 부작용을 보완하기 위해 친환경 건물과 임대주택 비율을 늘린 게 특징이다.
같은 달 27일 런던 도심에서 지하철로 약 20분 떨어진 그리니치 밀레니엄 빌리지(GMV)는 템스 강변을 따라 사이클, 조깅 등을 즐기는 젊은이들로 활기가 넘쳤다. 노란 외벽에 파랑 빨강 주황 초록 등으로 발코니를 칠한 건물 외형도 다채로웠다. 단지 곳곳의 생태습지공원에서는 주민들이 다양한 체험활동을 즐기고 있었다. 페트라 맵 씨(24·여)는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쾌적해 대학생이나 젊은 직장인이 특히 많이 산다”고 말했다.
이곳은 원래 가스공장이 있던 버려진 땅이었다. 1985년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76만9000m²에 달하는 땅이 건축 폐기물로 뒤덮인 채 방치됐다. 하지만 영국 정부가 20년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5단계에 걸쳐 2950채 규모의 주거단지를 만들기로 하면서 큰 변화가 시작됐다.
GMV의 30%가 공공임대주택이다. 대학생 등과 같은 청년, 서민계층이나 미혼모 등 사회적 취약 계층에 입주 우선권을 준다. 임대료는 런던 중심부의 25% 수준. 같은 건물에 일반주택과 임대주택을 섞어 계층 간 위화감을 없앴다. 또 모든 건물을 건설 폐기물과 에너지 소비를 줄인 친환경 건축물로 공사했다.
○ 버려진 운하지역에서 주민 친화형 상업지구로 변신한 버밍엄
제조업에 기반을 둔 버밍엄은 1970년대 이후 경쟁력을 잃으면서 빠르게 쇠퇴했다. 1980년대에는 10만여 명이 일자리를 잃기도 했다. 청년을 포함한 많은 주민들이 도시를 떠났다.
하지만 1987년부터 버밍엄시(市)가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면서 달라졌다. 버밍엄시는 불링 지역을 대형 상업지구, 브린들리플레이스를 업무지구로 조성해 도시재생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같은 달 29일 찾은 버밍엄은 완전히 살아나 있었다. 불링에는 쇼핑백을 멘 사람과 여행용 캐리어를 끄는 관광객으로 붐볐다. 브린들리플레이스는 기존 운하를 최대한 활용한 수변 산책로와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 해 버밍엄을 찾는 사람이 3810만 명(2015년 기준)에 달한다.
버밍엄시의 도시재생 원칙은 도시를 주민 친화형으로 진화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버밍엄시는 중앙부처인 교통부의 도움을 받아 차로 중심이던 도로 체계를 보행자 친화적으로 개편했다. 이와 연계해 운하 산책로, 광장 등을 조성한 뒤에야 건물을 올렸다. 기존 건물과 조화를 위해 새 건물은 20층을 넘지 않게 했다. 외관 디자인이나 필요한 시설 등을 결정할 땐 공청회를 열어 주민 의견을 적극 반영했다. 주민 애덤 데이비 씨(30)는 “업무지구지만 항상 생동감이 넘친다. 런던 대신 버밍엄으로 이사하는 청년들도 해마다 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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