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 국가를 이루지 못한 세계 최대 유랑 민족 쿠르드가 ‘쿠르디스탄’(쿠르드 독립국가의 명칭)을 현실화하기 위한 작업에 시동을 걸었다. 26일 DPA통신과 이라크통신 등에 따르면 전날 실시된 이라크 쿠르드자치정부(KRG)의 분리·독립 투표에서 유권자의 90∼93%가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투표율은 78%인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공식 집계 결과는 26일 오후에 나올 예정이다.
찬성표가 쏟아졌지만 이번 투표로 KRG가 당장 독립 국가로 인정받는 건 아니다. 하지만 쿠르드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효과와 함께 대외 협상력은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쿠르드 독립에 반대하는 이라크 중앙정부, 터키, 이란, 시리아 등은 강한 불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 걸음 떨어져 있는 미국과 유엔도 마찬가지다. 미 국무부는 성명을 통해 “KRG의 일방적인 투표는 이라크 중앙정부나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매우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유엔도 “상황을 불안정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 다시 불안해지는 이라크
이라크 중앙정부가 KRG의 독립에 반대하는 것은 미국의 침공(2003년)과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으로 엉망이 된 나라를 다시 혼란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전 도시 키르쿠크가 쿠르드에 넘어가는 것을 우려한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키르쿠크 유전에서는 하루 약 40만 배럴(이라크 전체 원유 생산량의 10%)의 원유가 생산된다. 쿠르드가 이 지역을 차지할 경우 이라크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기준 원유 생산국 2위 자리를 이란에 내주게 된다.
결국 쿠르드의 독립 움직임이 거세지고, 이라크 중앙정부와의 갈등도 심해지면 유전 지역에선 무력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전후 재건과 IS 잔당 퇴치를 위해 국력의 집중이 필요한 상황에서 역량이 분산되는 것도 이라크 중앙정부의 고민이다.
○ 쿠르드를 국가 위협으로 여기는 주변국들
터키, 이란, 시리아도 쿠르드 독립 움직임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이들에게 쿠르드 독립은 심각한 사회 혼란을 일으키고, 나아가 국가 안보까지 흔들 수 있는 위험 요소다.
터키의 경우 약 1470만 명(전체 인구 8160만 명)의 쿠르드계가 거주하고 있다. 이란과 시리아에는 각각 약 810만 명(8080만 명)과 170만 명(1800만 명)의 쿠르드계가 산다. 이들이 자국에서 독립을 외치거나 KRG의 독립 움직임에 가담할 경우 파장은 커질 수밖에 없다.
서정민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이란의 경우 쿠르드계가 정치·사회적으로 비교적 잘 동화됐지만, 터키와 시리아는 그렇지 않았다”며 “특히 터키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성향도 강경하고 자신의 권력 강화 필요성도 느끼고 있어 쿠르드계의 독립 움직임이 나타날 경우 매우 강력하게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터키는 제재 차원에서 KRG의 원유 수출 송유관을 막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또 이라크의 투르크계가 공격을 받거나, 터키 국경지대에서 충돌이 일어날 경우 군사적으로 개입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란도 KRG 지역을 다니는 항공편 운항을 금지했고, 투표 전날에는 KRG 관할 지역 인근에서 군사 훈련을 하며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란과 아랍권이 모두 ‘주적’으로 여기는 이스라엘이 국제사회에서 유일하게 쿠르드 독립을 지지한다는 것도 불안 요소다. 이스라엘은 쿠르드 독립으로 이란과 아랍 국가들의 혼란스러운 구도가 심화되길 원한다.
○ 정식 독립은 어려워
독립 움직임은 시작됐지만 쿠르디스탄의 정식 출범은 쉽지 않다는 전망이 많다. 주변국들과 국제사회가 반대하고 있고, 쿠르드 안에서도 정치적 성향과 거주 지역 등에 따라 입장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KRG를 이끌고 있는 마수드 바르자니 수반이 지나치게 독단적이라는 의견이 많다. 이번 국민투표 역시 바르자니가 자신의 권력 기반을 키우기 위해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평가도 나온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쿠르드 내부의 갈등이 계속되면 정식 독립 대신 이라크 중앙정부나 주변국들과 협상을 통해 자치권과 경제권을 더욱 보장받는 방안도 고려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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