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plomacy is like a jazz: endless variations on a theme.’(외교는 ‘재즈’ 같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끝없는 변주가 가능하니까)
미국 외교계의 ‘거인’으로 평가받는 고 리처드 홀브룩 유엔주재 미국대사가 한 말입니다. 예술을 사랑했던 이답게 미국의 외교를 재즈에 비유했네요. 글로벌 무대에 벌어지는 여러 상황에 대해 미국 외교가 택할 수 있는 옵션은 정말 많습니다. 그에 따라 상대국의 운명은 휙휙 바뀝니다. 지금 한반도 상황과 비슷한가요.
워싱턴 시내에 가면 연방정부 건물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역사적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벽조 건축물입니다. 미화 10달러 지폐 뒷면에 있는 재무부 건물은 ‘미국역사기념물(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될 정도로 아름답고 기품이 있죠. 미국의 역사가 어려 있는 건물에 들어갈 때면 왠지 압도당하는 느낌입니다. 한국의 정부부처들도 한국의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건축물에 터를 잡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미국 외교를 담당하는 국무부는 누런 색깔의 현대식 건물입니다. 역사적 향기는 거의 느낄 수 없죠.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이 은밀히 움직이는 미국 외교와 비슷합니다. 국무부 규모가 급팽창하면서 1947년 새로 이사 온 건물이죠. 해리 트루먼 대통령 때 지어진 건물이라 이름도 ‘해리 트루먼 빌딩’이라고 합니다.
미 국방부의 애칭은 ‘펜타곤’입니다. 멀리서 보면 오각형 모양이라네요. 국무부의 애칭은 ‘포기 바텀(Foggy Bottom)’입니다. 펜타곤보다 훨씬 멋스러운 애칭 아닌가요. 국무부 건물은 포토맥 강을 마주보고 있는 저지대(Bottom) 동네에 있습니다. 물가라서 안개가 많이 끼다보니(Foggy) 이런 애칭이 생긴거죠. 한국 유학생이 많은 조지워싱턴대도 이 부근에 있습니다. 지역적인 특성 때문에 생긴 애칭이지만 국무부의 특성을 절묘하게 표현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맞는 것도 틀린 것도 아닌, 외교적 수사로 가득 찬 미 국무부 브리핑을 듣다보면 정말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습니다.
국무부는 매일 오후 1시경 기자들을 상대로 브리핑을 합니다. 매일 정오경 시작되는 백악관 브리핑과 겹치지 않기 위해 1시간쯤 뒤에 한다고 합니다. TV를 보면 국무부 대변인 앞쪽으로 기자들이 많이 보이는 듯한데 사실 별로 기자들은 없습니다. 브리핑에 열심히 참석하는 기자들은 한국과 일본 기자들 밖에 없는 듯 합니다.
일본 특파원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에서 보면 한국 기자들도 집단을 이뤄 다니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워싱턴에서 만나는 한국 특파원들은 개별행동파들입니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게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죠. 일본 특파원들의 또 다른 특징은 대부분 영어 실력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겁니다. 물론 실력이 좋은 사람도 있지만 소수지요. 특히 영어 발음이 독특합니다. 브리핑룸의 모든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일본 기자가 특유의 영어 발음으로 질문하는 것을 듣다보면 왠지 제가 긴장이 될 정도죠.
일본 기자들은 브리핑룸에서 얌전한 편입니다. 그런데 흥분하는 때가 있습니다. 독도, 일본 역사교과서, 일본군 위안부 등 한일간 첨예하게 대립한 문제가 나올 때죠. 일본 정부에 유리한 미 국무부의 답변을 얻어내기 위해 딱할 정도로 이러 저리 돌려가며 질문 총력전을 폅니다.
한일갈등이 불거졌을 때 미 국무부는 절대로 한쪽 편을 드는 발언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서울 정도로 냉정한 미국의 외교원칙입니다. 한번은 일본 특파원들이 하도 비슷한 질문을 쏟아내자 국무부 대변인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며 핀잔 섞인 답변을 하더군요. 미국의 동의에 매달리는 일본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자신들의 역사에 자신이 없는 걸까’하는 생각을 했던 사람은 아마 저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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