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명문대를 졸업하고 뉴욕 맨해튼의 부동산과 금융계에서 활동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한 두 사람은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거친 ‘주류 중의 주류’였다. ‘잊혀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구호 아래 반(反)이민과 보호무역을 외치자 미국의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반전 매력에 열광했다. 두 사람은 워싱턴 주류 정치인들을 차례로 꺾고 각각 대통령과 초대 ‘수석전략가’ 타이틀을 달고 지난해 백악관에 입성했다.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의 동반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72)과 스티브 배넌 브레이트바트뉴스 최고경영자(CEO·65)의 이야기다.
그런 배넌이 지난해 8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백악관을 떠났다. 배넌은 영국 일간 가디언이 3일 오전 공개한 신간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에 포함된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장남 도널드 주니어의 ‘러시아 커넥션’을 “반역적(treasonous)”이라고 비판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심하게 찍힌’ 트럼프는 즉각 배넌과의 완전한 절연을 선언했다. 트럼프는 “배넌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 해고당한 그는 직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정신도 나갔다(lost his mind)”고 맹비난했다. 서로를 정치적 동지로 여기며 전략적 파트너십을 이어가던 둘은 공식적인 적(敵)이 됐다. ○ 트럼프를 가린 ‘사실상 대통령’의 그림자
지난해 2월 시사주간 타임이 배넌을 표지모델로 내세우며 ‘위대한 조종자(Great Manipulator)’라고 큰 제목을 달자 트럼프는 분노했다. ‘화염과 분노’의 저자 마이클 울프는 트럼프가 이 같은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고 밝혔다.
트럼프가 책에 소개된 배넌의 발언에 폭발한 직접적 이유는 배넌이 자신의 가족(장남)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앙금의 역사는 더 깊다. 트럼프는 임기 내내 배넌을 경쟁자로 인식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지난해 1월 말 뉴욕타임스(NYT)는 사설에서 반이민 행정명령을 주도하며 백악관을 장악한 것으로 평가됐던 배넌을 ‘사실상의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비슷한 시기 정치풍자로 유명한 코미디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는 트럼프를 아예 집무실 간이탁자에서 장난감을 갖고 노는 ‘철부지’로 표현했다. 그 풍자극에서 대통령 탁자에서 집무를 보는 이로 묘사된 인물은 검은 코트를 입은 해골귀신 차림의 배넌이었다. 자기애가 강한 트럼프로선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트럼프는 사실 취임하기도 전부터 “결정권자는 (배넌이 아닌) 나”라며 꾸준히 견제구를 던졌다. 지난해 4월 뉴욕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선 “나는 배넌이 우리 선거캠프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모든 경선 후보를 꺾었다. 내가 나 자신의 전략가”라고 강조하며 배넌에게 쏠리는 시선을 경계했다.
트럼프의 불만은 배넌이 백악관을 나간 뒤 ‘대통령 행세’를 적극적으로 하고 다니자 더 증폭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넌은 지난해 12월 월간 배니티페어와의 인터뷰에서 “돌이켜 보니 (백악관에서) 나는 직원에 불과했다. 이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무언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신간 ‘화염과 분노’에서 드러난 배넌의 야심은 더 노골적이다. 저자는 배넌이 백악관을 떠난 뒤 정치자금을 대는 공화당 ‘큰손’들까지 만나고 다녔다고 폭로하면서 “배넌은 자신이 대통령에 출마할 거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책에 적었다.
○ ‘화염과 분노’에 드러난 ‘배넌 對 자방카’ 대립
트럼프의 경계심이 충돌의 한 축이라면 다른 축은 배넌이 트럼프의 ‘가족 참모진’인 ‘자방카(Jarvanka·사위 재러드 쿠슈너와 장녀 이방카의 합성어)’에 가졌던 적대감이다.
‘화염과 분노’는 “백악관에서 유대인과 비(非)유대인 간의 전쟁이 일어났다”고 적었다. 유대인인 트럼프 사위 쿠슈너와 장녀 이방카, 그리고 배넌이 충돌했다는 것이다. 배니티페어에 따르면 이 두 파벌은 트럼프 당선 당일부터 당선 수락 연설에 통합 메시지를 담을지 말지를 두고 다퉜다. 배넌의 야심작인 반이민 행정명령이 연방법원에서 효력이 정지되자 그의 분노도 커졌다. 공화당 주류 성향을 반영하는 ‘자방카’는 이민·무역·인종정책과 관련해 사사건건 배넌과 부딪혔다.
배넌은 이들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려 지난해 8월 백악관을 떠난 뒤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가 이룩하기 위해 싸워온 트럼프 대통령의 시대는 끝났다”며 사실상 독립을 선언했다. 배넌의 독자 노선은 트럼프의 장남을 겨냥한 공격으로 공식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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