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05년 총선에서 1당 승리를 이끈 이후 제1야당인 사회민주당과 대연정에 합의했다. 1966년 기독민주당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총리가 사민당 빌리 브란트를 부총리 겸 외교장관으로 발탁해 첫 대연정을 이룬 지 39년 만의 대연정이었다.
당시 독일은 11%의 높은 실업률과 재정적자 350억 유로의 경제 불황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메르켈 총리는 사민당과 협상을 통해 △노동시장 유연화 △부가세 인상 △사회보장 축소 △재정적자 감축 등 4가지 핵심 사안에 합의했다.
보수당인 기민당은 당시 근로자의 해고를 쉽게 하고, 고령화로 인한 연금 재정 악화를 막기 위해 연금자가부담률과 은퇴 연령을 높여 재정 지출을 줄이는 데 주력했다. 사민당은 노동시장 유연화에 합의해주는 대신 연봉 25만 유로 이상 소득자에게 부과하는 부유세를 인상했다.
당시 A4용지 145쪽에 달하는 정책합의서 서문에는 “실업을 줄이는 것이 우리 정부 정책의 중심이 될 것이며 이번 대연정은 현 세대와 미래 세대의 번영을 위한 정치적 노력”이라고 쓰여 있었다. 실제로 13년이 지난 지금 독일은 완전고용에 가까운 3% 실업률과 꾸준한 2%대 경제성장으로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 기반에는 노동개혁을 통해 경제 체질 변화에 성공한 것이 밑바탕이 됐다.
12일 기민당을 이끄는 메르켈 총리는 제1야당인 사민당, 자매당인 기독사회당과 함께 집권 후 세 번째 대연정에 합의했다. 여당과 제1야당이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대연정은 ‘협치’의 대명사로 꼽힌다. 메르켈 총리는 집권 16년 동안 12년을 대연정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총선 이후 자유민주당, 녹색당과의 연정 시도에 실패한 뒤 총리직까지 위협받았던 메르켈 총리는 4선 연임에 사실상 성공했다.
대연정의 가장 큰 장점은 보수당과 사민당 단독 정부 때 나올 수 있는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정책보다 합의 가능한 중도로 정책이 수렴되고, 여야가 함께 국정을 운영해 정치가 안정된다는 데 있다.
2005년 당시 노동시장 유연화 위주로 합의가 이뤄졌던 대연정은 8년이 지난 2013년 두 번째 합의에서는 사민당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노동자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시간당 8.5유로 최저임금제가 도입되었다. 비정규직 근무 기한에 18개월 상한선도 마련됐다. 은퇴 연령을 올린 8년 전과 달리 45년 이상 일한 노동자에 한해 은퇴 연령을 67세에서 63세로 낮췄다. 국가 채무를 늘리거나 세금을 올리지 않는 범위 내로 한정한다는 기민당의 요구가 받아들여졌지만 경제 회복으로 국가에 곳간이 어느 정도 찼으니 노동자에게 이익을 나눠 주자는 데 합의가 이뤄졌다.
12일 세 번째 연정 합의 역시 기민당과 사민당, 기사당의 의견이 종합적으로 반영됐다. 기민당은 소득세의 최고세율을 높여 부자에게 돈을 더 걷자는 사민당의 요구에 맞서 누구에게도 증세는 없다는 원칙을 지켜냈다. 사민당은 향후 4년 동안 1000억 유로의 정부 소비를 늘리자고 했지만 기민당은 그 금액을 460억 유로로 막아내 균형예산이 가능해졌다.
반면 사민당은 연금, 교육, 헬스케어에서 많은 정부 투자를 받아냈다. 2020년까지 연금 지급액을 평생 일한 임금의 47.6%로 낮출 예정이었던 메르켈 정부의 계획에 제동을 걸어 2025년까지 현재 수준인 48%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건강보험에 고용주들의 기여를 늘리고, 주택 150만 호를 추가로 짓자는 주장도 관철시켰다.
보수 성향으로 난민에 엄격한 기사당은 매년 난민 수용 상한선 22만 명을 정해두고, 해외에 거주하는 난민 가족도 1000명 이상 못 들어오도록 했다.
대연정은 합의 전까지는 진통이 있지만 합의 후에는 틀에 맞춰 일사천리로 국정 운영이 이뤄지는 장점이 있다. 2013년 대연정 합의 당시 추진 과제로 ‘인더스트리 4.0 미래 전략’이 포함됐고, 이후 법도 예산도 순조롭게 통과되면서 독일이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선두주자가 되는 데 일조했다. 기민당과 사민당은 이번에도 2025년까지 독일 전역에 ‘기가바이트 네트워크’가 이뤄지도록 5세대(5G)를 비롯한 디지털 인프라에 대거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양당은 또 에너지와 관련해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율을 65%까지 끌어올리기로 합의했다.
이처럼 연정 합의안은 많은 진통을 겪더라도 도출되기만 하면, 그 후 정책은 예측 가능해지고 실행력 있게 진행된다. 원전 문제를 비롯해 노동개혁, 공무원연금 개혁, 최저임금 등 주요 개혁 정책마다 여야 갈등으로 표류하거나 용두사미로 끝나는 한국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 ‘대연정의 약발이 예전 같지 않다’는 우려도 높아
그러나 독일 대연정의 앞길이 순탄하기만 한 건 아니다.
무엇보다 대연정의 최대 장점인 대표성에 금이 가고 있다.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는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에 따른 양당 정치의 퇴조 현상으로 기민당과 사민당의 지난해 9월 총선 득표율은 53.5%로 과반 의석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두 당의 합이 70%에 육박했던 2005년(69.5%)과 2013년(67.2%) 때와 비교하면 ‘대연정’ 이름이 무색할 지경.
독일 대연정이 합의에 치중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기보다 지나치게 안정 위주로 흘렀고, 이에 싫증을 느낀 유권자들이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을 비롯한 극단주의로 향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독일 언론 슈피겔은 대연정을 ‘구석기 연합’이라고 불렀다.
대연정 이후 기민당과 사민당 모두 성적이 신통치 않아 당내 부정적인 내부 여론도 커지고 있다. 2005년 대연정 이후 치러진 2009년 총선에서 23% 득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참패를 기록한 사민당은 2013년 대연정 이후 지난해 총선에서 20.5%로 최악의 기록을 다시 세웠다. 기민-기사 연합도 2005년과 2013년 대연정 직후 총선에서 각각 33.8%와 33%로 역시 2차 대전 이후 가장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자 기민당 내부에서는 메르켈 총리가 권력 유지를 위해 과도하게 좌파 정책을 수용했다는 비판이, 사민당 내부에서는 또 들러리만 섰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사민당 지도부가 타결 직후 당내 설득 작업에 나섰지만 작센안할트주 사민당은 반대 입장을 정했고 헤센주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청년조직 등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12일 연정에 합의한 후 메르켈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이번 연정 합의가 향후 10년이든 15년이든 독일의 지속적인 안정과 번영을 보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장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47%는 메르켈 총리가 임기 2021년을 채우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메르켈 총리와 그의 대연정 앞에 험난한 길이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