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FBI, ‘총격 제보’ 2차례 묵살… 맥베스 읽던 교실서 비극 시작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19일 03시 00분


美 19세 퇴학생, 고교 총기 난사 17명 사망-16명 부상

17명의 목숨을 앗아간 미국 플로리다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을 계기로 총기 규제 여론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정신이상자의 소행으로만 몰아갈 뿐 총기 규제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아 비난을 사고 있다. 연방수사국(FBI)과 학교, 주 정부 등이 총격범에 대한 제보를 접수하고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는 등 대응 체계에도 구멍이 뚫린 것으로 드러났다.

○ 맥베스 읽던 교실에 총탄 난사

마이애미에서 북쪽으로 72km 떨어진 파클랜드의 마저리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에서 퇴학생이 저지른 총기 난사는 14일 오후 수업이 끝나기 10분 전쯤인 오후 2시 21분경에 시작돼 6분 만에 끝났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17명이 숨지고 16명이 부상당했다. 이는 최근 30년 동안 미국 내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 중 7번째로 사망자가 많은 것이다.

영어 수업 중이던 1층의 한 교실에선 학생들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의 하나인 ‘맥베스’를 읽고 있었다. 경보기가 울리면서 교실 안에 총탄이 날아들었다.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범인은 1층 입구 교실 4곳을 차례로 옮겨가며 반자동 소총인 AR-15를 난사했다. 어떤 교실은 문을 잠그고 바리케이드를 친 채로 버텼고, 어떤 교실에선 교사가 학생들을 데리고 옷장에 들어갔다. 2층으로 옮겨간 범인은 다시 교실 한 곳을 향해 총을 난사한 뒤 3층으로 올라가 총을 버리고 탈출하는 학생들 틈에 섞여 유유히 빠져나갔다.

약 1시간 뒤 체포된 범인은 백팩에 총을 넣고 등교하는 등의 행동으로 지난해 이 학교에서 퇴학당한 19세 니컬러스 크루즈로 밝혀졌다. 그는 학교에 들어와 화재경보기를 작동시킨 뒤 방독면을 쓰고 연막수류탄을 터뜨렸고, 나오는 학생들을 겨냥해 총을 쐈다. 범행 뒤에는 태연하게 인근 패스트푸드점에서 음료수를 사먹기까지 했다. 범인은 경찰에게 “공격을 실행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머릿속으로 그런 음성을 들었다”며 “그것은 악령의 목소리였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가 과거 총기에 집착하던 ‘왕따’였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또 단체 채팅방에서 “나는 유대인, 흑인, 이민자를 증오한다”거나 “동성애자들의 머리를 뒤에서 쏘라”는 등 수많은 과격 발언을 한 사실도 밝혀졌다. 그는 “친엄마가 유대인이고 그녀를 만나지 않아 좋다”고 쓰기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 로저, 린다 크루즈 부부에게 입양됐지만 로저는 2004년, 린다는 지난해 사망했다. 양어머니 사망 후 크루즈는 범행에 사용한 AR-15 소총을 비롯해 적어도 5정의 총기류와 방탄복을 사들였다.

○ 트럼프 “정신건강 문제일 뿐”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참사를 FBI에 공세를 펴는 호재로 활용해 빈축을 샀다. 그는 17일 트위터에 “플로리다 총격범이 보낸 그 많은 신호 전부를 FBI가 놓쳤다는 게 너무 슬프다. 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은 트럼프 캠페인과 러시아 간의 공모를 증명하려고 너무 많은 시간을 썼다”고 적었다. FBI가 2016년 대선 때 자신의 캠프가 러시아와 내통했다는 의혹을 수사하는 데 대한 불만을 총격 사건과 연관시킨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5일에도 트위터에 “플로리다 총격범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수많은 징후가 있었다. 이웃과 급우들은 범인이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적었다. 이어 몇 시간 뒤 대국민 TV 연설에선 이번 사건을 “끔찍한 폭력, 증오, 악의 광경”으로 부르며 “어려운 정신건강 문제와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총기 규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비판한 것처럼 실제 FBI는 범인인 크루즈에 대해 2차례의 제보를 받았지만 모두 묵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FBI는 크루즈가 지난해 9월 유튜브에 “나는 전문적인 학교 총격범이 될 것”이라는 내용의 동영상을 올렸다는 것을 신고받고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지난달 5일 범인의 지인이 FBI에 “크루즈가 범행을 계획하고 있다”고 제보 전화까지 했지만 이 역시 묵살했다.

FBI뿐만 아니라 학교 당국과 주 정부도 제보를 묵살했다. 온라인 매체 버즈피드 등에 따르면 총기 난사가 일어난 고교 재학생인 데이나 크레이그, 매슈 로사리오, 에니어 사바디니 등은 학교에 크루즈의 위험성을 알렸다. 이 중 사바디니는 크루즈의 옛 여자친구와 사귄다는 이유로 크루즈로부터 위협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크레이그는 “크루즈가 총기와 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사바디니와 크루즈가 다툰 뒤 학교에 알렸다”고 말했다.

플로리다주 아동가족보호국(DFS)과 지역 사법당국은 2016년 9월 크루즈가 스냅챗에 자신의 팔을 칼로 베고 총을 구입하고 싶다고 말하는 영상을 올린 사실을 확인하고 집으로 조사관을 보냈다. DFS는 크루즈와 면담까지 했으나 자신이나 남을 해칠 위험이 낮다고 결론을 내렸다.

○ 10년간 총기 사망자 31만여 명

트럼프 대통령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총기 규제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다시금 커지고 있다. 이번 사건을 포함해 벌써 올해에만 중고교에서 4건의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17일 미국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 연방법원 앞에는 수천 명의 시민과 학생 등이 몰려와 ‘지금 무언가를 하라’, ‘내 친구들을 죽게 하지 말라’, ‘투표로 몰아내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전날 밤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의 전미총기협회(NRA) 본부 앞에도 100여 명이 모여 총기 규제 강화를 촉구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15일 트위터에 “우리는 대다수 미국인이 원하고, 오래전 해결했어야 하는 총기규제법을 포함해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로 총기 규제 입법을 강하게 촉구했다. 공화당 전국위원회 재무위원장을 지냈고, 현재도 ‘큰손’ 기부자로 알려진 부동산 사업가 앨 호프먼 주니어는 공격용 총기류 규제 법안을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들에게는 후원금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 국무부와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통계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13년까지 10년간 미국에서 총기 사건 및 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31만6545명으로 집계됐다. 반면 테러에 의한 사망자는 313명에 불과했다.

이처럼 총기 규제의 당위성은 충분하지만 NRA의 로비를 이겨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회원이 420만 명인 NRA는 정치권에 막대한 자금을 뿌리는 것 외에도 전국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총기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NRA는 2016년 학교 사격 프로그램에 220만 달러(약 24억 원)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크루즈도 NRA가 자금을 지원한 주니어 ROTC 조직에 가입해 사격 훈련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주성하 zsh75@donga.com·위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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