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이란 항공참사 뒤엔 美경제제재 그림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1일 03시 00분


최근 여객기 추락 65명 사망 등 2000년 이후 최소 23차례 사고

지난해 7월 이란 테헤란의 이맘호메이니 국제공항을 떠난 이란항공의 A300-600 여객기는 이륙한 지 14분 만에 비상 착륙을 시도했다. 이륙하는 도중 조종사가 여객기 2번 엔진에 불이 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착륙할 때 마찰열로 타이어 5개가 불탔지만 다행히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사고기는 1993년 12월에 제조된 것이었다.

이달 16일에는 북동부 마슈하드 공항에 착륙하려던 이란 케슘항공 포커 F-100 여객기의 왼쪽 바퀴가 고장이 나 내려오지 않았다. 조종사는 결국 동체착륙을 시도했고 왼쪽으로 기운 여객기의 날개가 활주로에 닿으면서 불꽃이 크게 일었다. 당시 사고기에 탑승하고 있던 승객과 승무원 100여 명은 이대로 생을 마감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을 졸여야 했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이 여객기 역시 1993년 도입돼 운항된 기종이다.

○ 오랜 제재로 여객기 노후화

이란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서방의 제재가 본격화되면서 민간 항공기와 부품 수입에 어려움을 겪었다. 제재를 피하기 위해 제3국을 통해 중고 여객기를 수입하다 보니 이란 여객기의 평균 기령이 27년에 달한다. 노후 항공기 탓에 크고 작은 사고를 겪은 이란 조종사들 사이에서 “우리가 비상 착륙에 가장 능숙하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그러나 노련한 이란 조종사도 이틀 전 발생한 사고를 막지 못했다. 이란 현지 언론에 따르면 18일 오전 8시경 테헤란을 출발해 남서부 야수지로 향하던 이란 아세만항공 소속 ATR72-212기는 이륙 약 50분 만에 자그로스 산맥과 충돌하면서 완전히 파괴됐다. 아세만항공은 사고기에 탑승한 승객 59명과 승무원 6명이 모두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이란 당국은 추락한 여객기가 당시 짙은 안개로 시야를 확보하지 못해 산에 충돌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사고는 단순한 악천후의 문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서방의 제재 조치로 이란의 항공 산업이 쇠퇴한 까닭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이란 국영 프레스TV는 사고 직후 “미국의 항공 제재가 이란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고가 난 ATR72-212는 쌍발 터보프롭 식의 중단거리용 여객기로 1993년에 제작됐다. 이 여객기는 3주 전에도 테헤란 메라바드 공항을 이륙했다가 기체 이상으로 회항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랍권 방송 알자지라에 따르면 이 여객기는 부품을 못 구해 수리하지 못한 채 7년 동안 격납고에 방치돼 있다 지난해 10월에야 운항이 재개됐다.

아세만항공은 1994년에도 소속 여객기인 포커 F-28이 엔진 고장으로 이란 중부 나탄즈의 산간 지역에 추락해 66명 전원이 숨졌다. 2008년에는 보잉 737-219가 기체 이상으로 키르기스스탄 마나스 국제공항에 비상착륙을 시도하던 도중 폭발해 65명이 사망했다.

이란 정부가 지분 일부를 보유하고 있는 아세만항공은 23대의 여객기를 운항하는 소형 항공사다. 평균 기령은 약 24년으로 노후 문제가 심각하다. 유럽연합(EU)은 2016년 아세만항공의 여객기가 오래돼 안전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며 유럽 노선 취항을 취소시켰다.

이란에서는 2000년 이후 최소 23건의 항공사고가 발생해 1170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등 서방과의 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가 타결되기 전인 2015년 기준으로 이란 보유 민항기 250대 가운데 88대가 고장으로 운항되지 못했다.

○ 새 여객기 도입도 난항

핵합의 타결 이후 국제사회의 제재가 완화되면서 이란 정부는 항공기 교체를 서두르고 있다. 미국 보잉사와 프랑스 에어버스사는 2016년 9월 “미 재무부 산하 해외자산통제국(OFAC)으로부터 이란항공에 민항기를 판매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보잉 등 미국 회사가 이란과 거래하려면 OFAC의 판매 허가를 받아야 한다. 프랑스의 에어버스 역시 부품의 10% 이상이 미국산이어서 OFAC의 허가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이란항공은 2016년 12월 에어버스(100대), 보잉(80대)과 대규모 임대·판매 계약을 체결했다. 이듬해 4월에는 에어버스와 이탈리아 레오나르도(옛 핀메카니카)의 합작사는 ATR로부터 ATR72-600 20대를 구매하기로 했다. 아세만항공과 케슘항공, 키시항공 등 이란의 중소형 항공사들도 잇따라 보잉사와 구매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2017년 초 이란에 적대적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이란 항공기 계약의 최종 성사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이란이 항공기를 인도하는 과정에 까다로운 조건을 부여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미 하원도 이란에 항공기를 판매하는 데 제동을 걸고 나섰다. 피터 로스컴 하원의원(공화)은 “서방 기업들이 시리아 아사드 정권의 잔인한 전쟁을 부채질하는 데 쓰인 여객기를 이란에 팔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미 하원은 미 수출입은행의 수출금융 지원을 제한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란에 대한 항공기 수출 금지 조치를 논의하고 있다.

보잉사는 이란의 항공기 구매 자금의 최대 95%를 미 수출입은행 등으로부터 조달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미국 기업이 이란과 거래하려면 수출입은행의 금융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의회의 승인 없이는 수출입은행이 지원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다.

이란은 수백 대에 달하는 항공기 구매 계약을 체결하고도 정작 인도받은 새 항공기는 10대에 미치지 못한다. 올해 2월까지 이란이 인수한 여객기는 에어버스 3대, ATR 6대 등 9대다. 아세만항공은 지난해 6월 보잉사로부터 보잉 737 MAX 30대를 구매하기로 했지만 아직 OFAC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란은 계약 취소를 염두에 두고 OFAC의 승인이 필요 없는 러시아의 신형 여객기 수호이 슈퍼젯100 도입을 눈여겨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호이 슈퍼젯100은 12일 처음으로 테헤란 메라바드 공항에 착륙했다. 마그수드 아사디 사마니 이란항공사연합회 사무총장은 “몇몇 이란 항공사가 수호이 슈퍼젯100을 도입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고 말했다.카이로=

박민우 특파원 min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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