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美도 EU도 배신”, 對러 제재 힘빠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3일 03시 00분


‘스파이 독살’ 1차 기싸움서 패배

“러시아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로 약해진 영국을 테스트하고 있다.”

리나스 린케비추스 리투아니아 외교장관은 지난주 보리스 존슨 영국 외교장관(사진)과 러시아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이중 스파이 독살 시도 사건에 대해 회담한 뒤 “러시아는 항상 약점을 찾는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러시아는 영국이 브렉시트로 고립돼 EU가 열성적으로 영국을 지지하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가 내다본 러시아의 전략은 상당히 적중하고 있다. 양국이 외교관을 맞추방한 1차 기 싸움에서 러시아가 영국에 승리했다는 평가가 많기 때문이다.

존슨 장관은 21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제2차 세계대전 나치즘의 대명사,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날 의회에서 이언 오스틴 하원의원이 “푸틴은 히틀러가 1936년 올림픽을 이용한 방식으로 올여름 열리는 러시아 월드컵을 이용할 것”이라고 말하자 “1936년과 비교한 것은 정확하다”며 맞장구쳤다. 2차 대전 당시 옛 소련이 나치 독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5월 9일 전승절을 최고의 국경 행사로 격상시킨 푸틴의 자존심을 건드린 발언이었다. 러시아 외교부는 즉각 “존슨 장관은 러시아에 대한 증오로 중독돼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거친 말과 달리 이날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주재로 열린 국가안보회의(NSC)에서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를 당장 하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강한 제재를 예고했던 것에 비해 영국의 기세가 수그러든 것이다.

영국은 이달 4일 이중 스파이 독살 시도 사건이 발생한 직후부터 서방 동맹이 단합해 러시아를 압박하는 전략을 썼다. 하지만 마침 18일 러시아 대선에서 푸틴 대통령이 압승을 거두면서 오히려 부메랑이 되고 있다.

영국에 제일 큰 충격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배신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당선을 축하했다. 스파이 공격과 관련해 러시아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가까운 미래에 만나자”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에게 축하하지 말라”는 안보 보좌관들의 조언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는 22일 트위터에 “나는 푸틴 대통령의 선거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러시아와 잘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EU 역시 예전만 못하다. EU는 22일 열리는 EU 정상회의 합의문 초안에서 이번 사건을 규탄하면서도 책임자로 러시아 정부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을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19일 열린 EU 외교장관회의에서도 러시아에 대한 EU 비자 금지, 자산 동결 등 새로운 제재가 논의됐지만 이탈리아와 그리스 등 일부 국가가 러시아 편을 들면서 합의에 실패했다.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이 푸틴 대통령에게 당선 축하 전문을 보낸 것 역시 영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푸틴 대통령에게 당선 축하 전문을 보냈다. “축하한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안 썼지만 “성공을 기원한다”고 썼다. 단결이 필요한 때에 믿었던 EU 회원국들이 영국에 등을 돌린 셈이다.

반면 러시아는 균열을 틈타 21일 모스크바에 있는 외국 대사와 외교관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뒤 “영국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며 외교전을 펼쳤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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