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 28일 방한한 존 볼턴 당시 미국 국무부 차관은 정부 고위 관계자를 만나 미국이 입수한 정보라며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핵개발 계획을 알렸다. 두 달 뒤 미국 백악관은 “‘제네바 기본합의’는 무효화됐다”고 선언했다. 2차 북핵 위기의 출발점이다.
22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내정한 볼턴은 당시 미국의 대북 강경책을 이끌었던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핵심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안보사령탑을 ‘슈퍼 매파’로 불리는 볼턴으로 교체한 것을 두고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 美에서도 “트럼프 전시내각 꾸린 것”
미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세 번째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내정된 볼턴을 ‘단호한 국가안보 전문가’로 소개했다. “북한과의 전쟁이 장기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던 공화당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볼턴의 내정은 미국의 적들에게는 나쁜 소식이 될 것”이라고 했다. 미국 민주당의 크리스 머피 상원의원은 “맙소사,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의 안보 1인자가 북한과 이란에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믿고 있다”고 했다.
미국 내에서도 여야 모두 볼턴 보좌관 내정으로 북핵 협상이 어그러질 경우 미국이 대북 군사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 에드워드 마키 상원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볼턴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지명자를 데리고 성공적으로 전시 내각을 꾸린 셈”이라고 했다.
볼턴 내정자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것은 그가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한 초강경 정책을 이끈 인물이기 때문이다. 볼턴 내정자는 당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주장하며 미국이 이라크전쟁에 나설 명분을 제공한 데 이어 북한의 HEU 개발 의혹을 제기하면서 북-미 대치 국면을 주도했다. 볼턴 내정자는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5년 9·19공동성명이 채택된 뒤엔 주유엔 대사를 지내며 북한의 ‘슈퍼노트(100달러 위조지폐)’ 의혹과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 자금에 문제를 제기하며 국제사회의 대북 경제 제재 도입을 주도하기도 했다.
볼턴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내정되자 천영우 전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김정은이 임자를 만난 셈”이라고 말했다. 볼턴이 유엔주재 대사로 있을 당시 6자회담 수석대표를 지낸 천 전 수석은 “당시 볼턴은 우리와 코드가 안 맞았다”고 말했다. 우리 측은 재처리 시설 폐기를 전제로 한 만큼 경수로를 건설해 주는 게 나은 선택지라 판단했지만 볼턴 등 미국 측 강경파들은 북한이 당근만 챙기고 미국을 속이려는 술수라며 강하게 반대했다는 것. 천 전 수석은 “볼턴은 북한 체제라는 건 요즘 말로 ‘적폐’로 인식했다”며 “적폐 청산을 비핵화의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믿었던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 볼턴 “북한과 평화조약 체결할 필요 없어”
청와대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작지 않다. 대북 강경파로 꼽혔지만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허버트 맥매스터 안보보좌관과는 다르다는 평가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미 3국 정상회담을 제안하면서 비핵화와 북-미 수교, 경제교류 정상화를 일괄 타결하려는 시도에 나선 가운데 볼턴 내정자는 이 같은 구상에 공개적으로 반대해 왔다.
볼턴 내정자는 21일 자유아시아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북한에 경제적 지원을 제공할 필요는 없다. 또 미국이 북한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필요도 없다”며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하는 것이 (김정은의) 행운”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의 북핵 외교 구상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다. 볼턴 내정자는 또 “북한이 평창 겨울올림픽 초청을 수락했을 때 단지 북한 체제 선전을 위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실수”라며 평창 올림픽이 북한의 ‘시간 끌기’에 이용됐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남북 정상회담을 앞둔 한국에 대해 “한국 국민들이 북한의 약속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내건 안보 원칙의 핵심인 ‘전쟁 불가’는 물론이고 ‘한국이 남북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다’는 한반도 운전석론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부정적인 의견을 표명한 것이다.
청와대는 볼턴 내정자가 트럼프 대통령 보좌 역할을 맡게 되는 만큼 예전처럼 강경 일변도로만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고 있다. 전문가들도 볼턴 내정자가 기본적으론 트럼프 대통령의 판단 범위 안에서 움직일 것으로 관측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새 길이 열리면 그 길로 가야 한다”며 볼턴 내정자와 긴밀한 협력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북-미 대화의 의지를 보이고 직접 테이블에 앉기로 결정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북-미 정상회담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이 얼마나 충실히 회담을 준비할 수 있을지는 우려스럽다”는 의견도 있다. 한 외교 소식통은 “북한이 기대 이상의 성의를 보이면 화끈한 반대급부를 내놓을 수 있는 게 지금 트럼프 행정부”라며 “그 대신 김정은이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다면 체제를 종식시키는 버튼을 누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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