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대외 공개카드를 꺼내든 것은 미국이 요구하고 있는 강화된 비핵화 검증까지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히면서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협상력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과거 영변 핵시설 폭파 장면을 공개했던 것처럼 본격적인 비핵화 프로세스에 들어가기 전 핵실험장 폐쇄 과정을 대대적으로 선전해 북한의 진정성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미에 핵동결 대가로 대북제재 완화 및 체제 보장 등 반대급부를 요구하기 위한 제스처라는 지적도 나온다.
○ ‘깜짝 카드’로 진정성 인정받겠다는 김정은
29일 윤영찬 대통령국민소통수석비서관은 김정은이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대외적으로 공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김정은이) ‘일부에선 못 쓰게 된 것을 폐쇄하는 거라고 하는데, 와서 보면 알겠지만 기존 실험시설보다 큰 2개의 갱도가 더 있고 이는 아주 건재하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한미 정보당국에 따르면 풍계리 동쪽에 있는 1번 갱도는 2006년 1차 핵실험으로 이미 무너졌고, 북쪽의 2번 갱도도 2∼6차 핵실험을 거치면서 사용 불능 단계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미 건설 완성 단계에 이른 3번 갱도(남쪽)와 보완을 거치면 사용 가능한 4번 갱도(서쪽)의 경우 여전히 유용하다는 평가가 있다.
김정은이 3, 4번 갱도가 기존 실험장보다 더욱 크고 건재하다는 점을 직접 거론하고 나선 것은 미국에 자신의 진정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멀쩡히 핵실험을 할 수 있는 시설까지 없애겠다는 것이다. 미국 내에선 김정은이 2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핵실험장 폐쇄 방침을 밝힌 데 대해 평가절하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실제로 수전 손턴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대행은 24일 방한해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선언은 긍정적인 신호지만 말만으로는 비핵화 진정성을 확인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선을 그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도 29일 “일부에서 ‘이미 못 쓰게 된 핵실험장을 폐쇄하려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어 그 부분에 대해 김 위원장이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한 것”이라고 했다.
특히 청와대는 김정은이 핵실험장 폐쇄 과정에 한국과 미국의 전문가와 언론을 초청한 데 주목하고 있다. 미국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원칙을 강조하며 북한 핵시설에 대한 사찰과 검증 강화를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핵실험장 폐쇄 과정을 미국 전문가에게 공개하는 방식으로 수용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정보 당국자는 “김정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시선을 잡아둘 나름의 로드맵을 마련한 것 같다”며 “핵실험장 폐쇄 조치에 대한 회의적 반응으로 스텝이 시작부터 꼬이자 ‘실험장 폐쇄 공개’란 제안을 다시 마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 핵실험장 폐쇄로 ‘비핵화 청구서’ 들이밀 듯
김정은이 5월 중 핵실험장 폐쇄를 공언한 것도 관심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의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 전에 양보는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가운데 북-미 정상회담 전 핵 동결 조치의 속도를 높여 트럼프 대통령과의 담판에서 미국의 보상을 받아내겠다는 의지를 밝혔기 때문이다.
다만 일각에선 핵실험장 폐쇄 공개가 거꾸로 ‘핵보유국’이라는 점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면서 협상력을 높이려는 선전전의 일환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원식 전 합동참모본부 차장은 “핵능력이 완성됐음을 제대로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핵실험장 폐쇄를 공개하면서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 공식적인 검증단 대신 한미 전문가와 언론을 초청한 것을 두고 ‘보여주기식 쇼’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특히 김정은은 20일 노동당 전원회의 후 핵 실험장 ‘폐기’ 방침을 밝힌 것과 달리 이번엔 ‘폐쇄’하겠다고 했다. 폐기(dismantle)는 핵 시설 동결에 이어 핵 시설을 다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최종 조치인 반면 폐쇄(shut-down)는 가장 초기의 동결 단계 조치다. 한 외교 소식통은 “핵 사찰 등 핵심적인 프로세스를 요구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시선을 돌려 시간을 버는 작전의 일환일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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