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부터 7년 넘게 이어지는 시리아 내전 속에서 10대를 보낸 청년들은 가족과 친구를 잃는 아픔 속에서 자신을 다잡으며 성장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4일 유니세프한국위원회를 통해 시리아 현지에서 내전의 고통을 겪어내고 있는 청년 3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제 20대로 훌쩍 자란 청년들은 혼란을 ‘음악’, ‘사진’. ‘글’로 이겨냈다고 말했다. 처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생명의 존엄함을 깨닫고 서로를 돕는 가운데 ‘인류애’를 배웠다고 했다. 다음은 청년들이 시리아의 현실과 자신의 성장기를 담아 본보에 전해온 편지.
■건축학도 라님 무함마드 씨(19)의 편지 “전쟁은 저를 강하게 만들어 줬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건축학을 전공하며 어린 시절의 꿈을 이뤄가던 대학교 1학년 학생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한 현실 대신 단순한 세상을 새롭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런 큰 꿈을 갖고 있었지만 삶은 제게 더 큰 시련을 줬습니다.
저는 대학 첫 학기에 학과 우등생이었습니다. 고향 알레포로 전쟁이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저는 매우 열정이 크고 결단력도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알레포로 전쟁이 다가오기 직전 제가 느낀 감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날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시작됐습니다. 저는 시험을 준비하느라 밤을 새웠죠. 오빠는 차로 저를 학교에 데려다 줬어요. 시험은 잘 봤답니다. 그리고 오후 1시, 제 삶에 큰 충격이 닥쳤습니다. 학교가 공격을 받은 것이죠. 저는 살기 위해 뛰어가던 사람들의 비명을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날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제 안의 무언가는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늘 저와 함께 산다고 생각했던 제 가슴 속 불꽃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우리 시가 공개하는 긴 사상자 명단을 보며 ‘다음엔 내 이름이 명단에 오르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혼수상태에 빠진 것 같았습니다. 미래에 대한 꿈, 희망, 소중한 친구, 삶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18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저에게 힘을 준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제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말은 항상 제게 힘을 줬습니다. 음악도 힘이 됐어요. 저는 갇혀 있다고 느낄 때마다 기타를 손에 쥐었습니다. 기타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고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어요. 하지만 이것조차 곧 놓아야 했답니다. 어느 날 밤, 아빠는 우리 모두를 깨우고 “지금 가야만 해”라고 소리쳤습니다. 제가 아빠 목소리에서 그런 깊은 공포를 느껴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폭력적인 전쟁이 도시를 덮쳤고, 우리는 삶을 버리고 모든 걸 뒤로 한 채 떠나야 했습니다. 저는 악몽을 꾸는 것 같았지만 악몽이 아니라 현실이었어요. 떠날 때 저는 기타를 찾았는데 아버지는 ‘그 어떠한 것도 가져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인 기타를 뒤로한 채 등에 옷을 짊어지고 떠났습니다. 차에 올라타며 마지막으로 집을 뒤돌아 봤던 기억이 납니다.
2년간 우리는 집에서 집으로 옮겨 다녔고 저는 이런 삶을 잊지 않으려 모든 열쇠를 갖고 다녔습니다. 많은 친구들과 친척이 나라를 떠났습니다. 우리 가족은 도시 외곽에서 살았고 저는 배움을 이어가기 위해 친척들과 도시에서 지냈습니다. 저는 항상 ‘가족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내 기타를 다시 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좀비가 된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머지않아 강해져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엔 한 지붕 아래 가족과 함께 살 수 있게 됐어요. 삼촌은 고향집에서 기타를 찾아 갖다 줬습니다. 다른 가족에게 기타는 중요한 물건이 아니었지만 제겐 안전한 안식처였습니다. 기타를 다시 품에 안으니 눈물이 났어요. 기타에게 ‘보고 싶었어’라고 속삭였습니다. 저는 제가 강해져 있음을 느꼈습니다.
제가 3학년이 됐을 때 새로운 장이 열렸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새로운 목적이 생겼어요. 제가 겪었던 힘든 일을 겪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죠. 저는 봉사에 대한 열정을 충족시켜줄 일을 찾았습니다. 이웃 어린이에게 기타를 가르쳤어요. 레슨을 통해 아이들이 저처럼 다시 일어나고 꿈을 포기하지 않고 적응하도록 도왔습니다.
지금, 저는 이제 건축가가 됐습니다. 7년 전 제가 이런 자리에 있으리라 누가 생각했을까요? 제가 겪은 모든 것은 저를 더 강하고, 단단하게 만든 시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믿음이 ‘죽음을 거부하는 도시’라는 청소년 지원 활동을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저는 분쟁, 희망, 꿈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모임을 열었습니다. 이 활동으로 제 경험을 공유했고 힘든 사람들이 시련 속에서도 성공하도록 도왔어요.
시리아인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강한 정신력을 갖게 됐어요.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슬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만 제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도 깨닫게 해 줍니다. 저는 어느 때보다 강하고 어떤 미래가 다가오더라도 이제 준비가 돼 있습니다.
지금은 편지를 쓰기 가장 좋은 시기랍니다. 저희 가족이 곧 돌아갈 고향집을 보수하고 있거든요. 난민이 된 지 약 8년. 학생이자 피난민 신분이었던 저는 이제 건축가이자 생존자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자긍심과 힘을 갖고 돌아가 제 무너진 삶의 조각을 다시 맞춰보려 합니다. 그리고 제 집은 저를 승리자라며 환영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제 자녀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들려줄 것입니다. 아주 특별하지는 않은 이야기일지 몰라요. 하지만 제게는 충분히 특별합니다.
존경과 평화의 마음을 담아,
생존자 라님 무함마드
■기계공학도 가비 마쇼 씨(23)의 편지 “카메라 렌즈로 세상을 보며 진실을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가비 마쇼입니다. 시리아 하마 출신으로 현재 기계공학을 공부하려 홈스란 곳에 살고 있습니다. 또 유니세프에서 마련한 프로그램 ‘보이스 오브 유스’에 참여하며 사진 촬영과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분쟁은 제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시작됐어요. 분쟁이 일어난 지 7년이 넘었고 저는 다양한 일을 겪었습니다. 분쟁 초기에 저는 한 번도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 남자 청소년으로서 분쟁이 이상했지만 또 재미있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까요. 하지만 굉장히 고통스러웠습니다. 스릴과 흥분이 혼재된 국면은 무력 분쟁 수위가 높아지며 끝났습니다. 우리는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집을 떠난 몇 주 뒤 감사하게도 고향 집으로 되돌아 왔는데 무장한 남자들이 도시를 온통 무기로 뒤덮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뒤 저는 기계공학부에 입학했어요. 운 좋게도 제 고향에 있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답니다. 물 만난 고기처럼 대학 생활을 즐겁게 시작했어요. 사람과 도전을 배우는 시기였습니다. 시리아 전역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또 제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내 기술과 에너지를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습니다. 저는 친구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이 거주한 지역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기 시작했습니다. 유니세프가 블로그 운영 및 사진 촬영 강좌를 제공하기 전까지 저는 스스로 배워야 했습니다. 당시 저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마음과 제 에너지를 발산하기 위해 카메라를 활용했습니다. 작은 렌즈를 통해 저는 좀 전까지 마주하지 못한 세계를 발견했어요. 학업과 동시에 사진을 향한 저의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사진은 전쟁이 사랑으로, 눈물이 웃음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게 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세상과 연결하는 창문이고 진실의 세계입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제 주변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게 매우 중요해요. 그래서 저는 블로거 활동을 시작했어요. 제 말이 얼마나 영향력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 힘은 말 자체가 아닌 진실성에서 비롯됐어요. 저는 계속해서 아동권리, 아동 노동, 남녀평등, 청소년 및 사회에 관해 블로그에 글을 쓸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모든 게 글의 토대가 됐습니다.
제 인생을 바꾸고 제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게 만들어 준 카메라와 알파벳을 발명한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시리아의 젊은 청년으로서 저는 제 이야기가 들리길 바랍니다. 전쟁과 파괴가 중단돼 벽돌 하나하나가 쌓아지듯 우리나라도 재건되길 바랍니다. 이 세월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사람은 누구든 한 국가뿐 아니라 세상을 재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약학도 알리 압드 알라티프(20) 씨의 편지 “전쟁이 유일하게 준 긍정적 영향은 인도주의를 깨닫게 해 준 점.”
설명하기 참 어렵네요. 그리고 이런 상황을 스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수년이 걸렸습니다. 처음 시리아 전쟁이 시작됐을 때 저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어요.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온 나라를 뒤덮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실감했습니다.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죽음과 살상의 장면, 어린이와 여성의 유해, 그리고 도망치는 사람들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머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기억은 전쟁 속에서 자라난 세대에게 큰 난제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쉽게 잊거나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저는 상대적으로 전쟁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던 해안 도시 타르투스에서 살고 있어서 전쟁 발발의 중심지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확실히 알지는 못해요. 하지만 어린이들이 집과 가족,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잃는 사람들을 보며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온라인에서도 누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언쟁을 벌이고 목숨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것을 보며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여러 번 졸랐던 때가 기억나요. 어린 시절 저는 항상 악기를 유난히 좋아했죠. 그럴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긴 잔소리를 했습니다. 악화되는 국가 경제와 물가상승, 그리고 우리 국민들의 가난에 대한 얘기였어요. 제가 음악을 배우고 싶어 하는 동안 어디에선가는 끼니를 때울 빵 한 조각을 찾고 있는 어린이도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 땐 아버지가 참 야속했지만 요즘 저는 아버지가 어릴 적 말씀해주신 이 모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선 어린이가 총알을 맞아 죽어가고 있는데 제 이웃 6세 아이는 생일선물을 갖고 싶다고 부모님께 조르고 있으니 말이에요.
수년간 벌어진 전쟁으로 시리아 국민들에게 죽음은 너무도 익숙한 이미지가 돼버렸습니다. 죽음이 이렇게 일상이 돼 버렸다는 사실이 너무 참담합니다. 전쟁이 수많은 사람들의 집을 빼앗아가는 바람에 저희 동네에도 많은 보호소가 생겼어요. 13세 마람이란 아이도 집을 잃은 어린이 중 한 명이에요. 요즘 마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마람의 부모님이 언니를 부양하기 어려운 탓에 강제 결혼을 시켜버리는 일입니다.
9세 이브라힘이란 아이는 3년 전 가족과 함께 알레포에서 대피소를 찾아 타르투스로 도망쳤어요. 알레포에서 소년은 전쟁 탓에 학교에 갈 수 없었는데 타르투스에선 공부를 할 수 있게 됐고 성적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이브라힘은 “타르투스에 와서 아빠는 직업을 잃었고 가족은 텐트에서 살지만 전쟁 소리로 가득했던 알레포 보단 여기가 훨씬 좋아요”라고 말합니다. 이브라힘은 의사를 꿈꾸며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이 끔찍한 전쟁이 우리 국민들에게 미친 유일한 긍정적인 영향은 시민사회를 활성화시켰다는 점, 그리고 인도주의 활동의 중요성을 알렸다는 점입니다. 국가의 난관 속에서도 캠페인 수백 개가 전국에서 시행돼 사람들을 돕고 있어요. 청년들이 배우고 성장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시리아인들의 기질을 높이 사고 싶어요. 전쟁과 피난의 압력 속에서 발명과 창작에 기여하는 젊은 시리아인들이 진심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이 능력과 투지로 우리는 꿈꾸는 모든 것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