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판문점 선언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이 언급될 때 중국에게는 ‘초조함’을 주었지만 러시아에게는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홍완석 한국외대 교수는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논의 과정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과 관련한 러시아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5월 11일 국립외교원에서 한러대화 국립외교원 북방경제협력위원회 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 공동 주최로 열린 ‘문재인 정부의 신 북방정책 전략과 과제’ 학술 대회에서는 ‘러시아 패싱’을 넘어 러시아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됐다.
홍 교수는 “러시아는 북한 정권의 성립과 발전의 결정적 후원자였고 전통적으로 한반도 문제의 핵심 이해당사자라고 자부를 해왔는데 최근 비핵화 논의에서 소외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1997년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4자회담(남북미중)에서 배제됐을 때는 크렘린 지도자들은 큰 충격 받았고 대국적 자존심에 큰 손상을 가한 일종의 외교 참사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크렘린은 구소련이 붕괴할 때 보리스 옐친 정부가 성급하게 대북 관계를 멀리하고 친서울 일변도 노선을 달려온 것이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줄인 데 대한 후회와 반성이 있었다. 러시아가 주러 한국 대사관 외교관을 악기 밀반출 혐의로 추방하고 북한 공작원 소행으로 확신이 되는 블라디보스톡 한국 총영사 피살 사건도 부실하게 처리한 것도 일종의 외교 보복이었다는 것이다.
홍 교수는 “과거의 경험으로 보나 지정학적 가치로 보나 한반도 평화구도 논의 과정에서 러시아를 패싱하면 적지 않은 외교적 후유증과 손실을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 해양과 대륙을 잇는 한반도, 러시아와의 협력 지금도 이르지 않다
성원용 인천대 교수는 “박근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국민의 정부 ‘철의 실크로드’, 참여 정부의 ‘동북아 시대 구상’을 진전시킨 것이지만 북한과 불화해 실행할 수 없었다”며 “북한의 개혁 개방을 유도할 지렛대이자 통로로서 러시아와의 협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성 교수는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사태는 강대국간 강대강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의 선택지가 없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면서 “네트워크 다변화와 복합화를 위해 주변 4강 중 상대적으로 소원했던 러시아를 상대로 한 경제 문화 외교 등 다방면의 노력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 교수는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 극동 지역 개발도 촉진될 가능성이 크지만 극동 지역 개발에 따른 기회가 한국까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극동 경협이 러시아 극동 → 북한 접경지역 → 북한 특구로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북으로 가는 문이 열려도 한국이 극동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서성이다 사업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고 충고했다.
신범식 서울대 교수는 “한반도는 해양과 대륙 세력 사이의 ‘지정학적 단층선(geopolitical fault line)’에 위치해 ‘중간 국가’로서의 한계가 있어 이를 타개하기 위한 것이 ‘북방 정책’이었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1988년 올림픽 이후 한 차례 물결이 일어난 이후 평창 올림픽 이후 북한 비핵화 진전 기대감 속에 다시금 ‘신북방 정책’의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의 비핵화와 체제보장 및 평화체제를 교환하는 빅딜이 성사되어도 구체적인 실현은 긴 과정이 될 전망이며 무엇보다 북한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북방 정책이 좌절되는 ‘북한 환원주의’가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북한 환원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중앙 아시아 국가들과의 연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처럼 지정학적 단층선 상에 있으면서 중견국 외교를 펼치는 ‘동류 국가들(like-mined countries)’을 국제 무대에서 우군으로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한반도 지리적 이점의 명암
김태환 국립외교원 교수는 “대륙과 해양 사이의 지리적 위치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어 게이트웨이도 되지만 강대국 각축 사이에 끼인 ‘섀터 벨트(shatter belt·분쟁 지대란 뜻의 지리학 용어)’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과거에는 공간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네트워크가 중요하고 스페이스보다 플로우가 강조된다”며 “네트워크는 교통 통신 물류 연결만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연결되는냐가 더 중요하고, 무역만이 아닌 커뮤니케이션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대 유라시아 정책을 펴며 진출할 때 상품과 서비스 등을 넘는 공통의 ‘아이덴터티’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경제 교류만이 아닌 ‘주제 외교(themed diplomacy)’가 중요하다는 것.
북유럽 국가들의 ‘주제가 있는 개도국 지원(ODA)’을 한 예로 들었다. 북유럽 국가는 환경 인권 사회복지 등 주제에 중점을 둔 ‘주제 ODA’를 한다고 김 교수는 소개했다. 공유하는 주제가 결정되면 공동의 비전이 나온다며 요즘은 정체성이 언어 문화가 아닌 ‘구성적인 정체성’ ‘롤의 정체성’ 즉 함께 무엇을 해 나갈 것인가가 강조된다고 말했다.
이성우 해양수산개발원 본부장은 신북방 정책 추진에서 감성적인 접근도 일부 나타나고 있는 점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인천에서 북한 남포까지 1 TEU(20피트 컨테이너)당 철도 요금은 200달러, 배는 800달러라고 하며 철도 연결 필요성을 주장하는데 비용은 맞지만 실제로 이 구간은 철도도 배도 아닌 화물차로 갈 거리라고 말했다.
부산~베를린 구간 철도 요금이 1TEU 당 180만원이라며 선박 운송 요금보다 월등히 싸다고 하는 논리에도 숨은 요소가 적지 않다고 소개했다. 한국은 철도가 표준궤여서 러시아의 광궤로 환승해야 한다. 국경을 통과하는 절차 비용도 적지 않다.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을 안쓰는 이유 중에는 철로의 용량이 제한된 것도 있다. 쓰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요율 적용이 양이 많으면 요율을 올린다. 무조건 대륙 철도를 이용하자고만 해서는 안된다고 이 본부장은 말했다.
러시아의 행정 절차가 복잡하고 정책 변경도 잦은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이 본부장은 “농업과 수산업이 러시아로 그대로 진출하는 것은 위험성이 크다”며 “‘6차(1차 + 2차 + 3차 = 6차)산업’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 러시아의 원천기술, 중국의 일대일로, 북한의 SOC 북방 협력 가능성 무궁
한국기술벤처재단 김상환 창업센터 센터장은 “한-러 협력에서 창업 스타트업과 중소기업 간 협력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위기를 극복한 데는 러시아에서 들여온 많은 원천 기술이 도움이 됐는데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지금도 러시아의 원천 기술이 같이 손잡고 세계로 나가는 파트너를 찾고 있다며 한국 기업이 이런 기회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김 센터장은 강조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스크바는 어느 면에서 실리콘밸리보다 창업하기 쉬운 도시라는 말도 덧붙였다.
김 센터장은 러시아 원천 기술과 한국의 상용화된 기술이 손잡고 가는 것과 관련 이스라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스라엘이 가장 빠른 시간내에 ‘스타트업 국가’로 변신한 것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 초반 소연방 붕괴 과정에서 유태인 자치구의 100만 명에 이르는 유태인을 이스라엘로 이민온 것이 바탕이 됐다는 것. 이스라엘에는 러시아어만 쓰는 마을도 여럿 있는데 이스라엘에서 창업센터와 테크노파크가 여기 저기 생겨나 창업 국가가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고 김 센터장은 소개했다.
원동욱 동아대 교수는 ‘일대일로(一帶一路)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주제로 한 발표에서 “최근 서울에서 열린 한중간 일대일로 심포지엄에서 중국은 이미 한반도를 일대일로의 공간적 범위로 고려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원 교수는 중국의 일대일로가 2013년 처음 나올 때는 주로 서진(西進) 전략이었으나 지금은 남미 아프리카 등 전 지구를 포함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고 소개했다.
원 교수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시절 신흥공업화전략으로 다른 지역보다 성장률이 2% 이상 높았던 중국 동북 지역이 침체되어 있는 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한반도와 러시아 연해주로 이어지는 축의 개발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소개했다.
안병민 한국교통연구원 소장은 “‘4·27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은 북한 인프라에 대해 3가지 개념으로 요약했다. ’불편 불비 민망‘이다. 북한 철도의 평균 속도가 평양~베이징 45km, 일반적으로 20km 이하인데 김여정 등 북한 고위급 대표단이 남한에 와서 탑승했던 서울~평창은 250km였다”고 말했다. 북한은 천리마 만리마 마식령 속도를 내세우는 등 속도를 중시하는데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안 소장은 북한 투자 환경에 최근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고 전했다. 평양~원산간 고속도로에 8유로의 통행료를 받는 유료화를 처음 시작한 것도 한 예다. 평양~나진 하산 구간 에 별도 합작회사를 만들어 외부 자본으로 건설하려는 말도 나오는 것처럼 북한 사회간접자본(SOC)에 대한 투자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같은 북한 인프라 투자에 중국과 러시아와 손잡고 들어가는 것이 ’금강산 관광구‘처럼 북한이 일방적으로 봉쇄 몰수하는 것을 막는 방법이라는 말도 나온다.
● “러시아 협력, 잠재성 아닌 현실화할 때”
조병제 국립외교원장은 “3년전에만 해도 러시아 지인들을 만나면 한러 협력 잠재력이 크다고 말하곤 했지만 지금은 잠재성에 그치지 않고 현실화할 시점”이라며 “4·27 남북 정상회담은 북한 비핵화의 물꼬를 틀 뿐 아니라 신북방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고재남 국립외교원 교수는 “푸틴 대통령이 4번째 임기를 시작해 러시아의 경제침체 극복을 위한 새로운 6년이 시작됐다”며 “신동방 정책도 지속적으로 추진될 여건이 마련됐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4·27 남북정상회담이 신북방 정책 추진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규형 한러대화 조정위원장(전 주러시아 대사)은 “러시아는 북한 핵 위기 초기부터 6자 회담 참여 등으로 많은 역할을 해 왔고 동북아에서 러시아가 주요국인 것이 비하면 최근 한반도 상황 전개에서 역할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 위원장은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러시아는 자국을 지지하지 않은 한국에 섭섭할 수도 있지만 각 국은 사안별로 국익에 따라 이합집산할 수 밖에 없다”며 “한러 관계를 내실화하기 위한 최고 지도자간 소통을 넓히고 깊게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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