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현지 시간) 오전 8시, 프랑스 파리의 상징 노트르담 대성당 앞 광장에 설치된 임시 부스. 전날 밤 파리에서 동쪽으로 500km 떨어진 스트라스부르에서 온 제레미 카일(40)은 ‘불랑제’라고 불리는 제빵사의 상징인 흰 유니폼을 입고 하얀 밀가루를 쉬지 않고 반죽하고 있었다. 열다섯 살부터 견습생으로 제빵사를 시작해 두 개의 매장을 갖고 있다는 그의 손놀림은 예사롭지 않았다.
전통 바게트 경연대회의 프랑스 동쪽 지역 예선에서 1등을 차지한 카일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나는 긴 발효를 통해 남들보다 향과 맛을 더 낼 수 있다”며 “바게트를 만들기에는 약간 추운 기온이지만 내가 우승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부터 사흘간 전통 바게트 경연대회가 열린 파리에는 자타가 인정하는 바게트 고수들이 집결했다. 전국 13개 지역에서 예선을 거친 21개 팀이 13일과 14일 준결승을 치렀고 각각 3개 팀이 선정돼 15일 6개 팀이 ‘왕중왕’을 가렸다.
프랑스인들에게 바게트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다. 프랑스인의 98%가 매일 아침 바게트를 먹는다. 전국에 3만2000개의 빵집이 있고, 아침마다 갓 구워낸 따뜻한 바게트를 사려는 시민들이 긴 줄을 선다. 매주 쉬는 휴일도, 4∼5주에 이르는 긴 여름휴가도 빵집은 구청의 허락을 받아야 문을 닫을 수 있다. 빵집은 약국과 마찬가지로 시민 생활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주변 가게들과 쉬는 날이 겹치지 않도록 구청이 조정한다.
바게트 중 가장 비싼 건 ‘트라디시옹’이라고 불리는 전통 바게트다. 다른 바게트에 비해 20센트(약 260원) 정도 비싸다. 전통 바게트는 일반 바게트와 달리 밀가루, 물, 소금, 이스트 외에는 어떠한 첨가물도 넣어선 안 된다.
1930년대부터 프랑스의 주식으로 자리 잡은 바게트는 1960∼80년대 위기를 맞았다. 빵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계를 쓰기 시작하고 천연 발효 대신 이스트를 사용하면서 빵의 풍미가 떨어졌다. 1980년대 들어 의식 있는 장인들이 천연 발효종을 이용한 반죽과 전통 방식과 같은 맛을 낼 수 있는 오븐을 결합시켜 전통 바게트의 맛을 되살렸다. 프랑스 정부는 1993년 전통 빵 법을 만들어 전통 바게트의 품질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젊은 제빵사들은 전통 바게트 만드는 것을 꺼린다. 전통 바게트는 최소한 6시간 동안 숙성, 반죽, 발효, 굽기의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공정을 관리해야 한다. 하지만 전통 바게트 가격은 개당 1300원 안팎에 불과하다. 노력은 많이 들어가나 돈을 벌지도 못하는 제품인 셈이다. 프랑스 정부가 전통 바게트 경연대회를 5년 전부터 대대적으로 하는 건 그런 전통 바게트의 의미를 새기고 젊은 제빵사들에게 동기 부여를 하기 위해서다.
실제 이날 경연장에서 제빵사들은 발효할 때와 구울 때 늘 빵에 온도계를 꽂아 온도를 확인하며 정성스럽게 빵을 만들었다. 부르고뉴 지방에서 올라온 참가자 크리스토페르 퀴리에는 “전통 바게트는 테크닉보다는 빵을 만드는 순서를 빠짐없이 그대로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경연대회에서는 공정한 경쟁을 위해 밀가루와 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공개하지 않았다. 4가지 재료로만 만드는 빵이기 때문에 재료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소금조차 밀가루 1kg당 18g 이상 넣지 못하도록 제한했다. 그럼에도 전통 바게트에는 1000가지의 맛이 난다고 할 정도로 재료와 정성에 따른 맛의 차이가 큰 편이다.
전국 바게트 경연대회는 프랑스 빵 축제의 일환으로 열린다. 14∼20일 열린 빵 축제 기간에 매일 1만 명이 넘는 파리 시민과 관광객들이 행사장을 찾았다. 행사 주최사 중 하나인 제빵사 협회의 토마스 대표는 “프랑스는 전통 바게트보다 더 맛있고 훌륭한 빵을 아직 찾지 못했다”며 “첨가물이 없고 조리 과정도 복잡하지 않아 모든 빵집에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빵을 보존하기 위해 이런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경연 참가자들이 빵을 만드는 과정은 빵 축제를 즐기러 나온 관람객들이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 제빵사들에 대한 신뢰와 시민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서다. 노르망디에서 온 한 70대는 “옛날에 비해 요즘 빵들이 너무 맛이 없어졌다”며 “전통 바게트의 맛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승전이 열린 15일 다시 경연대회장을 찾아갔다. 결승까지 올라온 6개 팀은 6시간 동안 40개씩의 바게트를 만들었다. 오후 2시가 되자 파스칼 바리용 심사위원장이 자와 저울을 들고 나와 1차 심사를 시작했다. 바게트 길이 50cm 기준에서 오차범위 5%인 47.5∼52.5cm를 벗어난 크기의 바게트는 모두 탈락했다. 무게도 250g 기준에서 오차범위 5% 내에 있어야 탈락을 피할 수 있다.
길이와 무게 측정이 끝나자 심사위원 6명이 본격적으로 심사를 시작했다. 심사 기준은 외관, 겉면(색깔과 바삭함), 향, 속(색깔과 벌집구멍), 씹는 맛, 느껴지는 맛까지 6가지다. 바리용 위원장은 “좋은 향기와 바삭한 겉, 촉촉한 맛이 나는 바게트가 좋은 바게트”라며 “어떤 바게트가 가장 맛있는지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심사위원들은 심사에 오감을 모두 동원했다. 우선 바게트를 들고 겉의 굽기 정도를 파악한 뒤 손으로 겉의 바삭함, 속의 촉촉함을 확인했다. 바게트를 누르며 탄력성을 보기도 했다.
파리 경시청 최고 주방장인 브뤼노 심사위원은 빵 한 개를 기자에게 건네며 “이 빵의 냄새를 맡아봐라. 깊이 있고 향기로운 이 빵의 냄새는 다른 바게트와 다르다”고 말했다. 고소한 빵의 향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그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준은 일관성”이라며 “40개를 만들게 한건 모든 빵이 같은 향과 맛을 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드디어 전국에서 가장 맛있는 바게트를 발표하는 시간이 됐다. 이날 우승자는 프랑스 본토에 있는 빵집을 모두 제치고 아프리카 최남단 프랑스령의 조그만 레위니옹섬에서 온 스물네 살 젊은 제빵사 로랑 앙카타사미였다. 로랑은 본격적으로 제빵사의 길에 들어선 지 불과 3년 만에 최고의 제빵사로 선정돼 더욱 화제가 됐다. 로랑은 “처음에는 부모의 가업을 물려받기가 너무 싫어서 피해 다녔지만 이제는 내 모든 걸 담아서 빵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전통 바게트를 가게에서 얼마에 팔고 있는지를 묻자 “내 전통 바게트는 단돈 1유로(1300원)”라며 “누구나 와서 싼값에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건네받은 전국 1등 간판은 제빵사 세계에선 최고의 자부심이자 흥행 보증 수표로 통한다.
프랑스는 전통 바게트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시키려 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1월 제빵사들을 엘리제궁에 불러 모은 뒤 “나폴리 피자처럼 프랑스의 상징인 전통 바게트를 유네스코에 반드시 등재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빵의 나라’로 알려진 프랑스에서도 다른 먹거리들이 늘어나면서 빵의 소비가 급격하게 줄고 있다. 1850년 당시 프랑스인들은 매일 1인당 900g의 빵을 먹었다. 1950년대 330g으로 줄더니 지난해에는 130g까지 줄어들었다. 전국 빵집 수도 감소 추세다. 프랑스가 뒤늦게 유네스코 라벨에 집착하는 것도, 경연대회를 통한 홍보에 나서는 것도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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