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쓸 연출… 피살됐다던 反푸틴 러 기자 ‘멀쩡’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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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피하려” 우크라 정부 조작극

“나는 살아있다. 러시아는 나를 죽이지 못했다.”

지난달 30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보안국(SBU) 주최 회견에 참석한 기자들은 검은색 후드 셔츠를 입은 한 남성의 등장에 어리둥절해하며 웅성거렸다. 전날 우크라이나 경찰이 분명히 살해당했다고 발표한 러시아 출신 언론인 아르카디 밥첸코(41)가 살아서 나타난 것이다.

우크라이나 경찰은 지난달 29일 밥첸코가 동네 가게에서 먹을 것을 사들고 키예프 자택에 도착하자마자 수차례 총을 맞고 숨졌다고 발표했다. 집에 있던 아내가 쓰러진 밥첸코를 가장 먼저 발견했고 병원으로 옮기던 중 구급차 안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등에 총을 맞고 엎드린 채 쓰러져 있는 밥첸코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의 부인 올체카는 사건 당시 화장실에 있어서 범인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고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우크라이나 정보기관과 밥첸코의 자작극이었다. 바실리 그리차크 SBU 국장은 “밥첸코 암살을 막기 위한 연출이었다”며 “러시아 정보기관에 포섭된 우크라이나인이 킬러를 고용해 밥첸코를 암살하려 했다. 두 사람 모두 체포됐다”고 말했다. 밥첸코는 “우크라이나 보안국이 두 달 전 나에 대한 살해 시도 관련 첩보를 입수했고 한 달 전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나에게 공동으로 작전을 펴자고 제안했다”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러시아는 킬러에게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결승전(5월 26일) 전에 나를 살해하라고 요구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보안국은 키예프에서 한 남성을 체포하는 동영상을 공개하기도 했으나 그의 구체적인 신원이나 추적 및 체포 과정, 러시아 배후와 관련한 증거는 밝히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유명한 군 전문기자로 손꼽히는 밥첸코는 대표적인 ‘반(反)푸틴’ 언론인이다.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과 시리아 내전 개입 과정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끊임없이 비판했다. 그는 살해 위협이 커지자 지난해 러시아를 떠나 우크라이나로 망명한 뒤 우크라이나에서 TV 앵커로 활약해 왔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 “내가 러시아에 있었다면 감옥에 있거나 파이프로 머리를 맞았거나 총을 맞거나 독살을 당했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근 2년 사이 키예프에서만 3명의 ‘반푸틴’ 언론인이 의문사했다.

밥첸코는 이번 작전을 위해 아내와 6명의 자녀(5명은 입양아)까지 감쪽같이 속였다. 밥첸코는 기자회견장에서 “특히 아내에게 사과한다”며 “그녀는 지난 이틀 동안 지옥에 있었다”고 양해를 구했다. 러시아 탐사보도 전문기자 파벨 카니긴은 “믿을 수 없는 그리스도 부활 스토리”라고 말했고 우크라이나 내무장관은 “이번 작전은 흡사 셜록 홈스 스토리 같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발끈했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밥첸코가 살아있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선전효과를 노린 것이 분명하다”며 밥첸코 살해 배후설을 부인했다.

우크라이나 내무장관은 “보안국과 경찰의 공조 아래 정보 유출 없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치켜세웠으나 할렘 데시르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언론자유 부서장은 “언론인의 생명을 두고 거짓 정보를 유포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며 “국민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라고 비판했다.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밥첸코와 가족에 대한 24시간 경호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반푸틴 기자#피살#우크라 정부 조작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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