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현지 시간) 오후 2시 35분 에어차이나 소속 보잉 747 항공기가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착륙했다. 남북 정상회담 때와 같은 검은색 인민복을 입고 비행기에서 내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직접 영접에 나선 비비안 발라크리슈난 싱가포르 외교장관과 악수하며 환하게 웃었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32년 만에 한반도와 중국을 벗어나 국제외교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약 6시간 뒤인 오후 8시 20분 전용기 ‘에어포스원’을 타고 싱가포르 파야 르바르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준비된 ‘캐딜락원’에 올라 12분 만에 숙소인 샹그릴라 호텔로 향했다. 뒤늦게 도착한 트럼프 대통령의 숙소는 김정은의 숙소인 세인트레지스 호텔과 불과 570m가량 떨어져 있었다.
○ 정상국가 외교 나선 김정은
김정은은 이날 리셴룽(李顯龍) 싱가포르 총리와의 회동으로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내준 전용기에서 내린 김정은은 북한 인공기를 양쪽에 달고 북한 국무위원장 휘장을 새긴 전용 벤츠 차량을 타고 숙소인 세인트레지스 호텔로 향했다. 이 호텔은 지난해 김정은이 암살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이복형인 김정남이 자주 이용하던 호텔이라고 워싱턴포스트는 보도했다.
김정은은 호텔을 나와 이스타나궁을 방문해 리 총리와 약 30분간 회담을 했다. 리 총리의 에스코트를 받고 회담장으로 들어선 김정은은 싱가포르 핵심 내각들과 악수한 뒤 리 총리에게 회담에 배석한 김영철 통일전선부장과 리수용 국제부장, 노광철 인민무력상을 직접 소개했다.
김정은은 리 총리에게 “조미 상봉이 성과적으로 진행되면 싱가포르 정부의 노력이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거라고 생각한다”며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 성과에 기대를 나타냈다. 리 총리는 “북한 인민들이 이날을 위해 많은 고난을 겪고 희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우리는 한반도의 오래된 문제가 매우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리 총리를 먼저 만난 것을 놓고 비핵화 담판을 앞두고 북한이 정상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 행보에 나선 것이라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 대북제재에 동참하며 일시적으로 교역을 단절했던 싱가포르와의 양자 회담을 통해 대북제재 완화 요구의 신호를 보내려 한 것이라는 얘기다. 리 총리도 김정은과 만나기 전 기자회견을 열고 “북-미 합의가 나오고 대북제재가 해제된다면 북한과의 교역이 확대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 ‘매우 기분 좋다’ 외에 말 아낀 트럼프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전날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도중 싱가포르로 날아온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오후 늦게 도착해 별도의 행사를 갖진 않았다. 김정은과 달리 싱가포르 공군기지에 착륙한 에어포스원에서 내린 트럼프 대통령은 계단 밑에선 대기하던 싱가포르 정부 관계자들과 만나 차례로 악수했다. 거수경례를 한 싱가포르 군 관계자에겐 똑같이 경례로 화답하는 여유도 보였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현장에서 기자가 ‘회담과 관련해 기분이 어떻느냐’고 묻자 “매우 좋다(very good)”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다만 이후 한마디 말도 없이 전용차인 ‘캐딜락원’에 올라 삼엄한 경계 속에 샹그릴라 호텔로 직행했다. 현지 소식통은 “18시간 넘은 비행으로 우선 지쳐 보였고 아무래도 역사적 회담을 앞두고 말을 아끼고 집중하는 듯했다”고 전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양 정상은 첫 대면에서 통역사들만 둔 채 단독(One-on-One) 회담으로 일정을 시작할 것”이라며 “모든 일이 잘 풀리면 공동성명까지 발표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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