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후 싱가포르를 상징하는 유명 특급 호텔인 마리나베이샌즈 전망대. 이틀 전인 11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밤마실을 나와 들렸던 바로 그 장소에서 싱가포르 전경을 둘러보니 시원한 바다와 함께 자본주의 시장경제 속에 번창한 도시 곳곳이 한눈에 들어왔다.
금융지구에 빽빽이 들어선 고층건물들과 족히 100여 척은 돼 보이는 싱가포르 앞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화물선들은 김 위원장이 분명 부러워 할만한 광경이었다.
‘김 위원장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북한으로 돌아가 원산경제특구를 이렇게 꾸며볼 생각을 했을까?’
현장에서 확인한 결과 김 위원장이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들어섰던 입구는 실제로는 출구로 사용되는 문이었다. 기존의 입구를 통해 입장하면 가장 먼저 바다가 보이지만, 출구를 통해 전망대로 들어서면 싱가포르의 고층건물들과 마리나베이샌즈 카지노 건물 등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싱가포르의 발전상을 나타내는 현대적인 건물들을 먼저 보고 싶어하는 김 위원장의 속마음이 반영된 변칙적인 동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중앙TV가 14일 공개한 기록영화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이날 마리나베이샌즈 전망대의 명소 중 하나인 야외수영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고층건물과 카지노, 그리고 야외수영장까지. 김 위원장이 마음속으로 그려보고 있는 원산의 미래의 모습이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나보인 듯 했다.
● ‘셀카’ 배경이던 꽃까지 교체… 철저한 ‘최고 존엄’ 흔적 지우기 작업
기자는 13일 마리나베이샌즈 전망대를 포함해 김 위원장이 11일 방문했던 싱가포르의 주요 관광지 세 곳을 모두 찾았다. 전망대에서 보이는 풍경에선 경제발전에 대한 김 위원장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지만, 현장에선 ‘최고 존엄’의 자취를 지우기 위한 ‘흔적 지우기’ 작업도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날 밤 김 위원장의 깜짝 방문으로 유명세를 탄 싱가포르의 식물원 ‘가든스 바이 더 베이’의 실내전시관인 ‘플라워돔’은 김 위원장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작업이 가장 눈에 띄게 진행된 곳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던 김 위원장과 비비안 발라크리슈난 싱가포르 외무장관의 ‘셀카’ 배경이 된 이곳의 꽃들은 그가 다녀간 날로부터 이틀도 되지 않아 모두 새 꽃으로 교체된 것이다.
기자가 셀카가 찍힌 정확한 장소를 알고 싶다고 묻자 현장에 있던 아르바이트 요원들은 ‘플라워돔’의 중앙에 있는 꽃으로 장식된 전시무대를 가리키며 “저기 어딘가 있는 게 확실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 ‘셀카’ 배경에 보이는 꽃들과 실제 전시 현장의 꽃들은 분명 달라보였다. 고개를 갸우뚱 하며 그 주변을 약 30분 간 서성거리자 기자를 수상하게 여긴 보안요원은 ‘이제 그만 가라’는 듯 다가와 “그 꽃들은 수명이 다했다. 다른 꽃으로 교체됐다”며 “사진 배경에 있던 꽃들은 찾을 수 없을 거다”라고 일러줬다.
표면적으론 ‘꽃의 수명’이 이유였지만, 이는 혹시라도 현장에 남았을지 모르는 김 위원장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북한 당국의 요청에 의해 이뤄진 작업일 가능성이 높다. 현지 일간 스트레이트타임스는 11일 김 위원장이 마리나베이샌즈 전망대를 다녀간 뒤 직원들이 김 위원장의 지문이 묻어있을지 모르는 유리 패널 등을 닦는 모습이 목격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이 식물원에서 셀카를 찍는 모습과 그 주위는 조선중앙TV가 14일 공개한 기록영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김 위원장의 그 날 행적에 대해 내려진 일종의 ‘함구령’은 같은 날 찾은 마리나베이샌즈 전망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장에 있는 직원들에게 ‘지문 청소’와 관련된 보도를 포함한 김 위원장의 방문 당시 행적에 대해 물었으나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날 현장에 없었다” “일찍 퇴근시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겠다”는 답변을 남겼다. 현지 언론을 통해 당시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전망대 음식점의 매니저 이름을 대며 직접 얘기해 볼 수 있냐고 음식점 직원들에게 묻기도 했으나 “오늘은 이곳으로 출근하지 않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 ‘주빌리다리’에서 느껴진 金의 ‘카지노 사랑’
김 위원장이 겨우 3분 정도 머무르다 떠난 ‘주빌리다리’에선 그의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마리나샌즈베이에선 자신을 바라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드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지만, 주빌리다리를 찾았을 땐 ‘위원장님!’을 외치는 시민과 취재진의 목소리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3분가량만 경호원 수십 명을 대동해 우르르 몰려와 주변을 돌아본 뒤 쏜살같이 현장을 빠져나갔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기자는 김 위원장을 따라온 조선중앙TV 카메라기자 두 명이 그를 보기 위해 모여 있는 취재진과 군중을 촬영하기 위해 강렬한 조명을 눈에 코앞에서 계속해서 쏘아댄 탓에 이날 김 위원장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김 위원장의 마지막 행선지였던 만큼 현장은 두 시간 이상 완전히 통제돼 있었고, 소총을 든 경찰 병력 등을 제외하곤 통제 구역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김 위원장의 자취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13일 통제구역에서 다시 관광지로 변신한 ‘주빌리다리’ 위에 서보니 김 위원장의 마리나베이샌즈 호텔과 카지노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는 점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다리 위에서 수십 초 간 멈춰서 도시 야경을 관람한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가보니 눈에 들어오는 유일한 풍경은 바로 그 호텔과 카지노건물이었다. ‘주빌리다리’를 다 건너면 싱가포르의 금융지구를 코앞에서 조망할 수 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이날 다리를 딱 절반만 건너 자신의 마음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넌지시 알린 채 현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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