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초강경 반(反)이민 정책’의 상징인 ‘반이민 행정명령’을 둘러싼 논란은 26일 연방대법원이 해당 정책의 효력을 인정한다는 판결을 5 대 4로 내리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행정명령에 무슬림 인구 비율이 높은 5개 나라(이란 시리아 리비아 예멘 소말리아) 국민의 미국 입국을 제한한다고 명시했지만 국가안보와 관련된 정책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행정부에 있고 해당 정책을 꼭 ‘종교 차별’로 보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소송 원고 측인 하와이 주정부의 주장과는 다르게 이 행정명령이 ‘미국 이민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공화당 의원들과 백악관에서 만난 자리에서 “대법원 판결은 헌법의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했다. 행정명령의 입국 제한 대상국엔 북한과 베네수엘라도 포함됐지만 하와이 주정부는 이 두 나라는 소송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같은 날 대법원은 낙태에 반대하는 기독교계 단체도 낙태수술 기관에 대한 정보 등을 제공토록 의무화한 캘리포니아 주정부 정책도 위헌으로 판단했다.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는 수정헌법 1조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대법관들의 의견은 역시 보수 의견이 앞선 5 대 4로 나뉘었다. 이처럼 26일은 보수 진영 전체에 승리의 날이었다. 여러 의제를 두고 10여 년간 이어질 ‘보수 우위’의 대법원 구도를 분명히 확인시켜 줬기 때문이다.
○ ‘반이민 행정명령’ 두고 ‘언쟁’ 붙은 대법원
보수 성향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판결문에서 “(행정명령 반대 측은) 무슬림 인구 비율이 높은 나라들이 지목됐다는 점을 지적하지만 그 사실만으로 종교적 적대감이 유추되지는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또 “대법원은 한 세기 넘도록 외국인의 입국과 추방이 ‘근본적으로 사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정부의 주권적 권한’이라고 인식해 왔다”고 적었다. “(반이민) 행정명령은 ‘미국 이민법’에 규정된 대통령 권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진보 성향의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소수의견을 읽으며 해당 행정명령이 특정 종교를 겨냥한 위헌적 요소를 담았다고 항변했다. 그는 ‘이슬람은 우리를 혐오한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무슬림 때문에 문제를 겪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트럼프 대통령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읽었다. 뉴욕타임스(NYT)는 “(소토마요르 대법관의 어조는) 강경하고 단호했다”며 “시끌벅적하던 법정이 침묵에 휩싸였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양측은 법리로 다투는 차원을 넘어 대법원 내 상대 이념 진영을 직접 거론하며 비판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이번 판결은)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의 강제구금을 합법화한 대법원 판결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판결문에서 “반대 측이 어떤 수사적 이점을 얻으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2차대전 당시 판결은) 이번과 아무 관계없다”고 소토마요르 대법관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 갈수록 짙어지는 美 진보 진영 ‘2016년의 악몽’
미국 진보 진영은 연이은 ‘5 대 4’ 판결을 바라보며 ‘2016년의 악몽’을 떠올리고 있다. 당시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보수 법조계의 거두’ 앤터닌 스캘리아 전 대법관이 2월 별세하자 중도 진보 성향의 메릭 갈런드 워싱턴 연방항소법원장을 대법관으로 지명했으나 공화당의 반대로 좌절됐다. 결국 그해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고 이듬해 보수 성향 닐 고서치가 대법관으로 임명되면서 현재의 ‘보수 우위’ 대법원 구도가 굳어진 것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선임보좌관을 지낸 데이비드 액설로드는 26일 자신의 트위터에 “대법원의 연이은 ‘5 대 4’ 판결로 공화당의 비겁한 인준 방해 전략의 의미가 분명해졌다”고 지적했다.
미국 진보 진영은 앞으로 더 큰 ‘대법원발 쇼크’가 다가올까 숨죽이고 있다. 중도 보수 성향의 ‘캐스팅보트’로 평가받는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82)의 은퇴설이 심심찮게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가 트럼프 대통령 임기 중 은퇴할 경우 더 젊고 더 보수적인 대법관 임명이 유력하다. 뉴욕매거진은 27일 “보수층에 케네디 대법관의 은퇴 소식은 강력한 흥분제나 다름없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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