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다 6시간 늦은 시차의 러시아 서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인천에서 비행기로 9시간 이상 걸린다.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 6월 20일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1926~2008)의 동상이 세워졌다. 전신 높이 135cm의 작은 동상 제막식에 소요된 시간은 30분 남짓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먼 곳까지 찾아와 동상 제막을 지켜본 사람들은 누구일까.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말하는 박경리 선생, 그리고 선생과의 인연을 들었다.
대학 본관 뒤 동양학부 건물 옆 현대조각공원에 세워진 동상 앞 면에는 선생의 시 ‘삶’의 마지막 구절인‘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가 새겨졌다. 2013년 11월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앞 ‘푸슈킨 플라자’에 러시아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1799~837)의 동상이 세워진 것에 대한 답례이자 한러 우호를 높이는 문화 교류의 하나로 추진됐다.
선생 동상이 왜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 세워졌는지에 대해 한러대화측은 베르비츠카야 대학 이사장(전 총장)의 제안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모교(법학 전공)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푸틴이 초기 정치인 생활을 시작한 정치적 고향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국내 작가의 동상이 해외에 세워지기는 매우 이례적이다. 더욱이 지난해 상반기 상트페테르부르크대 한국학과에 선생의 이름이 들어간 강좌가 개설됐다. 중앙대 김세일 교수는 “한국 작가의 이름이 들어간 대학 강좌가 개설되기는 전세계를 통틀어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선생의 외동딸인 토지문화재단의 김영주 이사장. 그는 “토지를 완성하고 창작공간을 지원하는 작가의 소망이 담긴 원주와 고향 통영, 토지의 주요 배경인 최참판댁 하동에 이어 러시아 상트까지 네 곳에 같은 형상을 갖춘 동상을 세워져 하나의 문화적 벨트가 형성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선생은 1946년 1월 김행도 씨와 결혼한 뒤 그해 김영주 이사장을 낳았고 이듬해에는 아들(김철수)을 출산했다. 1950년 6·25 전쟁에 남편과 사별했고 1956년에는 10살에 채 안된 아들이 사망해 김 이사장은 홀로 어머니를 모셨다. 박경리 선생은 1990년 인촌상 등 생전에 다수의 상을 받았다.
김 이사장과 함께 제막식에 참석한 권오범 토지문화재단 사무국장은 “해외 작가 문인들을 초청하는 재단의 ‘해외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러시아인들도 10여년째 매년 한 명씩은 포함됐다”며 “동상 제막을 계기로 한-러 문학 및 문화교류에 재단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것 같다”고 말했다.
“원주캠퍼스 부총장으로 부임하면 두 분은 꼭 찾아가 신고식을 하는 데 연세대에 장학금을 기증한 사업가 청파 한승룡 선생과 원주에서 작품 활동을 하시는 박경리 선생이다. 학생 때부터 독자였지만 2004년 8월 부임해서 인사드리면서 처음 직접 뵈었다”
행사 기간 줄곧 밝은 색 중절모를 써 눈에 띈 한상완 전 연세대 원주캠퍼스 부총장(한국도서관협회 회장 역임)은 선생과의 인연의 시작을 이렇게 말했다.
‘토지’가 문예지 ‘현대문학’에 연재될 때부터 찾아 읽은 독자였던 한 전 부총장은 “처음 뵙는데 부드러운 표정이지만 눈빛이 예리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기(氣)가 느껴졌다”고 했다. 그 후 선생과 단 둘이 혹은 박완서 선생과 셋이서 이곳저곳 음식점을 찾아 다니기도 했다. “영덕에 모시고 가기도 했는데…”라고 얘기할 때는 벌써 눈시울이 불거졌다. 오이 김치를 새로 담그거나 통영에서 대구 등 생선을 보내오면 선생이 보내주기도 했다고 한다. 부총장 시절 바쁠 때도 오전 7시 불쑥 “한 총장 바뻐?”하면 급히 일정을 조정해 달려가 찾아뵙기도 했다.
“선생의 손을 잡고 다닌 남자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과 둘이 손잡고 다니는 것을 보면 박완서 선생이 ‘꽃 미남 애인 두어 좋겠어요’라고 놀리기도 했습니다.”
한 전 부총장은 “선생이 아들이나 조카처럼 여기셨다”며 “아무리 먼 곳에라도 동상이 세워진다니 오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선생은 1926년, 한 전 부총장은 1941년생으로 15살 차이다.
한 전 총장은 “‘토지’에는 675명의 인물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모든 계층 사람이 신분 지위 학식 등에 따라 다르게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에 반했다”며 “선생이 관상쟁이처럼 사람을 읽는 눈이 있으신 것 같았다”고 말했다.
2006년 퇴임해 원주를 떠난 후에도 차가 막히면 2시간도 걸리는 거리를 5년 넘게 찾아갔다. “2008년 5월 5일 돌아가신 후 기일 마다 외지에서 통영까지 10번 모두 참석한 사람은 나와 마로니에북스 이상만 사장 뿐일 것”이라고 말했다.
‘문학 소년’이던 그도 2009년 69세에 등단해 3권의 시집을 냈다. 호는 우강(友江). 부총장 퇴임 문집 ‘105가지 향기로운 이야기’에 실으려고 선생에게 글을 한편 부탁했는데 거절 당해 마음이 무지 아팠는데 1주일 후 ‘러시아 인형’이라는 시를 보내오셨다며 눈물나게 감사했다고 회고했다.
선생 하면 생각나는 것을 묻자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시 ‘일 잘하는 사내’)가 생각난다고 했다.
“올해로 서거 10주기를 맞았지만 애정 그리움이 더욱 커진다. 뭔가 선생을 더욱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온 것도 그 때문이다.”
마로니에북스 이상만 사장은 “선생은 생전에 나 뿐 아니라 아내(강영애)도 가족처럼 가까이 지냈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부인과 아들까지 가족 3명이 함께 와서 제막식을 지켜봤다.
마로니에북스는 미술 인문 전문 출판사지만 소설책은 별로 출판하지 않았는데 출판계 지인의 소개로 김영주 이사장을 만나게 된 후 ‘토지’도 출판하고 선생과는 아들처럼 아끼는 가까운 사이가 됐다고 이 사장은 말했다. 현재 ‘현대문학’에서 나온 ‘녹지대’와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두 종을 빼고는 선생의 20여종 모든 작품을 출판하고 있다.
제막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를 나눠줬다. 이 사장은 책만 출판한 것이 아니라 원주 토지문화관의 작업창작실 설계 건축도 총괄했다.
“2006년 ‘토지’ 만화책 버전을 발간했는데 교보문고에서 찾는 사람이 많아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선생께 팬 사인회 한 번 하시자고 했다가 바로 거절당하고 한 소리 들었습니다.”
선생은 “날 보고 싶으면 책을 보면 된다. 내가 굳이 얼굴을 내밀 필요가 없다. 작가는 글로 말하면 된다”고 얘기했다고 이 사장은 선생을 회고했다.
선생은 줄곧 원주에서 통원 치료를 받다 마지막 3개월 가량 서울중앙병원에서 입원 후 임종했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거의 알리지 않았다. 이 사장 부부도 임종을 지켰고 올해 10주기까지 한 번도 빼지 않고 통영을 찾고 있다.
조계종 월정사 원행 스님은 승복을 입고 있어 인천 공항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는 일행이 모일 때부터 눈에 띄었다.
“스님은 선생과 어떤 인연이 있으신지요?”
“1995년 월정사 120여개 말사 중 하나인 구룡사 주지로 가게 됐습니다. 그 때 원주에 있는 선생을 찾아가 처음 뵈었는데 서재 서가에 꽂힌 빨간 표지의 화엄경 3권을 보고 놀랐습니다”
원행 스님은 선생 동상 제막식 행사를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1박 2일 만나는 동안 여러 차례 선생과의 인연을 강조했다.
스님은 “‘빨간 화엄경’ 3권은 탄허(呑虛·1913~1983) 스님이 해제한 구 화엄경에서 중요 구절만을 뽑아놓은 것인데 이 책을 본다는 것은 누군가 고승과 교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선생이 서가에 가득 꽂힌 책을 다 보셨겠나 싶어 몇 권 꺼내 펼쳐보니 모두다 여기 저기 밑줄이 그어져 있어 놀랐다고 했다.
스님은 “구룡사 주지 8년과 그 후 여러 기회가 있을 때 뵈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탄허 스님이 정신적인 아버지라면, 선생은 마음의 어머니”라고 말했다. 원행 스님은 선생의 영결식에도 참석하고 월정사 주지로 있을 때 49제를 월정사에서 지냈다고 말했다. 합장!
‘러시아 작가동맹’이 2012년 한러대화(KRD) 허승철 사무국장(고려대 교수)에게 서울에 푸슈킨 동상을 세우자고 제안한 뒤 2013년 11월 푸틴 대통령 방한에 맞춰 실현됐다. 이를 계기로 한-러 양측이 2014년 상트페테프부르크대에 한국 문인의 동상을 세우기로 한 뒤 박경리 선생으로 최종 결정됐고 동상도 그해 제작됐다. 하지만 러시아 땅에 동상이 세워지기 까지는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다. 박경리 선생의 작품이 러시아로 번역된 것이 없고 선생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러대화 문화예술분과 소속인 중앙대 김세일 교수는 “러시아는 영원히 구조물로 남는 동상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며 “선생의 작품이나 개인에 대한 자료가 너무 없다는 것이 조각상 건립에 걸림돌이 됐다”고 말했다.
김 교수와 고려대 석영중 교수는 2014년부터 3년간 매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서 양측 전문가들이 참가한 가운데 선생의 작품과 인생 등을 논의하는 세미나를 가졌다. 김 교수는 “세미나에서 논의된 내용을 러시아어로 옮겨 온라인 도서관인 ‘옐친 도서관’ 자료실에 올렸다. 지금은 러시아로 번역된 토지 1권 등 러시아어로 된 자료가 상당히 검색된다”며 무사히 동상 제막식을 마치게 된 과정에서 겪었던 애로를 소개했다.
지금은 한국에서 나온 선생 관련 다큐 영상에 러시아어 자막을 넣은 영상 자료도 도서관 자료에 넣고 상트페테르부르크대 도서관과 ‘러시아 도서관’에 선생의 작품도 기증했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는 김 교수가 1990~1995년 러시아 문학 석박사 과정을 다닌 곳. 자신이 다녔던 동양학부 교정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느낌이 남다르다고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 선생 동상을 세운 공로로 고려대 허승철 석영중, 서울대 조소과 권대훈 교수가 감사패를 받았다. 이진현 전 상트페테프부르크총영사와 베르쉬닌 러시아측 한러 대화 문화예술분과 위원장도 감사패를 받았다.
석영중 교수는 김세일 교수 등과 함께 러시아에 박경리 선생을 알리는 작업을 해 온 것을 평가받았다.
석 교수는 선생과의 인연의 시작을 묻자 “대학시절 선생의 ‘시장과 전장’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로서 좋아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석 교수는 “해외 동상 제막식에도 왔지만 개인적으로 선생을 만난 적은 없다”며 “2000년대 초 ‘한국 러시아 문학회 학회’를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할 수 있게 해줘서 문화관에 가게 됐으나 그 때도 선생은 먼 발치에서만 뵈었다”고 말했다.
2011년 한러대화 문화예술 분과에서 김영주 이사장을 만난 뒤 선생 집안과 인연을 맺었다. 2012년 2회 ‘박경리 문학상’에서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다. 토지문화재단과 박경리 문학상 위원회, 동아일보사가 공동 주최하는 박경리 문학상은 2회부터 한국에서 수여되는 첫 세계 문학상으로 격상됐다. 올해 5월 원주에서 가진 선생 동상 제막식 때는 ‘박경리 선생과 러시아 문학’ 주제로 특강도 했다.
석 교수는 “선생은 여고시절 ‘죄와 벌’을 한 숨에 읽느라 밤을 새우고, 학교에도 빼먹을 정도로 러시아 문학을 좋아했다”며 “도스토예프스키를 특히 높이 평가하셨다”고 말했다. 석 교수는 “한-러간에 정신세계가 비슷한 것이 많은데 일례로 어머니에 대한 감수성이 높고 숭배에 가까울 정도로 사랑하는 정서가 한국과 통하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고려인 4세인 상트페테르부르크대 동양학부 한국학과 최인나 교수가 지난해 상반기 학부 3,4학년이 수강하는 ‘박경리의 생애와 문학’ 강좌를 개설한 주인공이다.
2014년 한국에서 제작을 마친 박경리 선생 동상은 지난해 8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운반되어 왔다. 러시아 땅에 온 뒤에도 주상트페테르부르크 한국 총영사관에 보관했다가 12월에야 대학 교정으로 옮겨 진 뒤 제막식을 기다리며 천으로 싸여 있었다.
“선생의 동상도 세우기로 했는데 학생들이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학측에서도 흔쾌히 선생 강좌 개설을 승인했습니다.”
박경리 선생 동상 제막식에 참석하는 한국 방문단이 탄 비행기가 1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할 때는 밤 10시가 넘었다. 러시아는 여름철 백야(白夜) 시기로 날은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지만 밤늦은 시간에 대표단을 맞아 안내를 맡는 등 궂은 일을 하면서도 시종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최 교수는 “증조부 시절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넘어왔고 아버지는 카자흐스탄, 어머니는 우즈베키스탄”이라며 “대학 92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가 한국어를 처음 배웠다”고 말했다. 고려인이냐고 묻지 않았다면 러시아어 잘하는 한국 교민으로 착각할 정도로 한국어가 유창했다.
이규형 한러대화 한국측 운영위원장(전 주러 대사)은 2013년 푸슈킨 동상이 세워질 때 한러대화 위원장을 맡아 선생 동상 러시아 안착을 주관했다. 제작을 마친 동상이 러시아에 가는데도 시간이 걸리고 다음에는 한국 대통령의 방러 혹은 다른 고위층 인사의 방문 때를 기다리다 늦어지기도 했다.
이 위원장은 “다음에 대통령이 상트페테프부르크에 들를 수 있을 때 제막하자는 얘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문재인 대통령 방러 기간 중 도종환 장관이 참석할 수 있으면 하자고 했다”며 “천으로 감싸 놓은 조각상이 이제 그만 숨을 쉬게 해드리자”고 했다고 이번에 제막식 ‘D-데이’를 잡은 배경을 설명했다.
선생 조각상 건립 공로로 감사패를 받은 허승철 고려대 교수(한러대화 한국측 사무국장)는 퓨슈킨 동상 제막부터 시작해 한-러 동상 교류의 최일선에서 실무적인 일을 맡았다. 서울 푸슈킨 동상에도 ‘도움 주신 분들’ 중 한 명으로 이름이 새겨졌다.
박경리 선생의 동상은 2015년 고향 통영과 ‘토지’의 최참판댁이 복원된 경남 하동에 세워진데 이어 올해 5월 원주 단구동 박경리 문학공원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대를 합쳐 모두 4개다. 모두 서울대 조소과 권대훈 교수가 제작했다. 선생 조각상 제작자는 김영주 이사장이 직접 골랐다. 김 이사장은 “갤러리 관계자 등 주위에서 3,4명을 추천받아 프로필과 작가의 작품 사진들을 보고 정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박경리 선생의 작가로서의 내면까지 잘 표현할 조각가를 찾았다”며 “권 교수를 직접 만난 적은 없어 약간 모험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권 교수도 이번 조각상 제막식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소설가 이세기 씨는 일간지 문학 담당 기자로 만나 소설가 선배이자 스승으로 모셨고 후에는 선생이 딸처럼 여기는 지인이 됐다.
‘접시꽃 당신’의 시인이자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 도종환 장관은 제막식 축사에서 “박경리 동상 제막은 선생 개인뿐 아니라 한국 문학에 대한 평가가 있어 이뤄진 것”이라며 “러시아에서 한국의 문학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선생 제막식이 열리는 다음날인 21일 문재인 대통령이 2박4일 일정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정상회담 준비로 바쁜 가운데 우윤근 주러시아 대사가 참석했고 권동석 주 상트페테르부르크 총영사도 총영사관에 보관중이던 선생 조각상이 무사히 제막식까지 마치는 것을 지켜봤다.
언론진흥재단 민병욱 이사장과 천원주 미디어진흥실장은 앞으로 한-러 언론 교류 등에서 박경리 선생 작품 등 한국의 문학적 성과도 적극 소개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조각상 제막식에 참석한 롯데지주 오성엽 부사장 겸 커뮤니케이션실장은 “롯데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부지에 ‘푸슈킨 플라자’ 부지를 제공했으며 2013년부터 ‘푸슈킨 하우스’에서 매년 주최하는 시 낭송회와 ‘푸슈킨 문학상’을 후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막식 이틀 뒤인 2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러 대화 제4차 KRD 포럼’ 준비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오지 못했지만 한러대화 한국측 운영위 이형숙 팀장(문학 박사)은 동상 제막식 자료 등 실무 준비를 도왔다. 대한항공은 선생 조각상을 무료로 러시아로 운송해 줬다.
한편 선생 조각상 제막식에 러시아 측에서는 블라디미르 메딘스키 문화부 장관, 니콜라이 크로파체프 상트페테르부르크대 총장(한러대화 러시아측 조정위원장)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크로파체프 총장은 “빠르면 올해 중 ‘토지’ 2권 러시아어판 완역을 추진중”이라며 “박경리 선생 뿐 아니라 한국 문학이 러시아에 널리 알려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러시아의 10개가 넘는 대학에서 박경리 선생에 대한 강의가 필수 과목으로 다뤄지고 있고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칼리닌 블라디보스토크 4개 도시의 연구기관에서 연구하고 있다”며 “상트페테르부르크대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한국에 대한 강의를 시작한 대학”이라고 말했다. 크로파체프 총장은 “박경리 선생에 대한 영화가 나오면 러시아로 방영하고 그런 영화가 없으면 러시아와 함께 만들어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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