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씨(Mr. Trump), 사자의 꼬리를 갖고 놀지 말라. 그랬다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대(對)이란 1단계 경제 금융 제재 재개를 앞두고 있던 지난달 22일.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포문을 열었다.
조롱 섞인 훈계를 들은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서 분노를 표출했다. 다음 날 모든 철자를 대문자로만 써서 “미국은 당신의 정신 나간 소리를 두고 볼 나라가 아니다. 조심하라”고 맞받았다. 지난해 9월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서 이란을 ‘불량 국가’로 비난한 것을 시작으로 두 지도자 간 설전의 수위는 고조되고 있다.
미국은 ‘이란 핵협정’ 탈퇴에 따라 7일 1단계 대이란 제재를 재개한 데 이어 11월 5일부터 이란산 원유 거래 차단을 포함한 2단계 제재까지 예고해 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와 비핵화 협상을 두고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함께 로하니 대통령은 지구촌 안보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키맨’으로 떠올랐다. 특히 로하니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어떤 대미 공동보조를 취할지도 관심이다. 트럼프와 내부 강경파의 공세에 낀 로하니 대통령의 선택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 ‘외교의 달인’에서 설전 최전방으로
2013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지난해 재선에 성공한 로하니 대통령에게는 ‘외교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따라붙는다. 성직자 출신의 이란 혁명 1세대로 외교 국방 요직을 두루 거친 데다 2003년 초대 핵협상 이란 측 수석대표로 활동한 경력 때문이다. 이어 2015년 7월 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과 ‘이란 핵협정’을 타결했다.
반미 성향이 강한 이슬람 보수파가 득세하는 이란에서 로하니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미국과의 대화와 협상을 강조하는 온건한 실용주의자로 입지를 굳혀 왔다.
그가 2005년 ‘핵 민족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전 대통령과 수차례 거친 논쟁 끝에 핵협상 수석대표 자리에서 물러난 일은 유명하다. 당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서방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경 기조를 고집했다. 하지만 로하니는 “양보할 것은 양보하면서 서방 제재를 피해 핵개발을 지속하자”는 유화 노선으로 맞섰다.
2013년 대선에서 로하니 대통령은 국제사회 제재에 따른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서방과의 전면적인 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 이란 언론은 그의 당선을 “경제 회생에 대한 이란인의 염원이 담긴 깜짝 승리”로 평가했다.
그런 로하니 대통령이 달라졌다. 최근 미국을 겨냥해 내놓는 말폭탄은 트럼프 대통령의 독설에 뒤지지 않는다. 8일 이란을 방문한 리용호 북한 외무상에게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어떤 의무도 약속도 지키지 않는, 믿을 수 없는 나라”라고 말했다. 미국에 보란 듯이 우방인 북한과의 ‘반미 공조’를 과시한 것이다. 지난달 말 트럼프 대통령의 대화 제안에도 “칼로 다른 사람을 찌르고 난 뒤 대화를 하고 싶다면, 먼저 칼부터 빼라”고 일축했다.
미국을 향한 그의 적대적인 반응에는 이란의 복잡한 내부 사정도 반영됐다는 분석이 많다. 무엇보다 로하니 대통령을 당선시킨 민심이 돌아서고 있는 것에 대한 우려다. 핵협정이 체결되고 서방 제재가 풀리면 경제도 나아질 것이라는 그의 말이 ‘장밋빛’ 공약에 그치자 실망감이 커진 것이다. 이란의 경제성장률은 핵협정 직후인 2016년 12.5%로 반짝 치솟았지만 지난해 4%대로 주저앉았다. 트럼프가 핵협정을 파기하고 제재에 나서면서 경제는 악화 일로를 걸을 것으로 보인다. 테헤란 등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고 이를 파고든 강경 보수파의 공세도 거세다.
스콧 루커스 영국 버밍엄대 교수는 최근 미국 CNN 인터뷰에서 “로하니 대통령의 거친 발언은 미국에 맞대응하려는 의도보다 국내 보수파를 달래려는 제스처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 미-이란, 전면전과 재협상의 기로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로하니 대통령은 이제 반미 기치를 더욱 높이 들어 핵 개발의 길로 다시 나설지 아니면 ‘외교적 출구’를 찾을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7일 미국의 1단계 제재가 공식 발효된 뒤 로하니 대통령은 대응 방향과 수위 조절에 고심하고 있다.
로하니 대통령은 독자적인 결단으로 북-미 관계를 급반전시킨 김정은 위원장과는 국내 정치적 입지가 다르다. 보수파의 강한 반발 때문에 대미 협상에 나서기가 쉽지 않다. 이란 정부가 “우라늄을 더 높은 농도로 농축할 수 있는 준비가 됐다”며 미국을 겨냥해 ‘구두 시위’를 하며 사태 추이를 관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미 강경 무력 집단인 혁명수비대는 “이란은 (전 세계 원유 해상 물동량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호르무즈해협의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라며 로하니 대통령을 압박하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로하니 정부가 미국과 물밑 접촉을 진행 중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로하니 대통령뿐만 아니라 11월 중간선거(하원의원 전원과 상원의원의 3분의 1을 뽑는 것으로, 대통령 임기 중간에 치러지는 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도 북핵에 이어 이란 문제에서도 가시적 성과를 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유달승 한국외국어대 이란어과 교수는 “미국과 이란 간 상호 공방은 국내 정치를 의식한 측면이 크다. 공방이 시끄러울수록 파국을 막기 위한 물밑 협상은 무르익고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북-미처럼 양국 간 전격적인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스라엘 매체 마아리브 등은 유엔 본부의 서방 측 고위 외교관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과 로하니 대통령이 다음 달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에서 만날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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