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모국 아르헨 ‘낙태 합법화’ 법안 부결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13일 03시 00분


유권자 60% 합법화 찬성에도 보수 가톨릭 반발… 교황도 “반대”
일각 “무산됐지만 변화 시작”

9일 새벽.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국회의사당 앞에 여성 수만 명이 모여들었다. 이날 상원이 38 대 31로 ‘선택적 낙태 합법화’ 법안을 부결시킨 것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집회에 참여한 마리엘라 벨스키 국제앰네스티 아르헨티나 담당자는 미국 시사주간 타임 기고문에 “비를 맞으며 그곳에 선 사람들은 비통한 패배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들의 분노는 낙태에 얽힌 아르헨티나 사회의 해묵은 부조리를 변화시키고 있었다”고 적었다.

전 세계 가톨릭을 이끄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태어난 아르헨티나에서 낙태 합법화 법안이 6월 처음 하원을 통과해 상원 표결까지 간 것만으로도 주요 외신의 관심이 집중됐다. 아르헨티나에서 낙태가 허용된다면 보수적 가톨릭 전통의 영향력이 막강한 남미 대륙 전체에 변화의 바람이 일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강간을 당했거나 임신부 생명이 위험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낙태가 허용된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관습적 거부감이 큰 탓에 위급 상황에서도 일반 병원에서 임신부의 낙태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일이 거의 없다”고 전했다. 이로 인해 비밀리에 자행되는 불법 낙태 시술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사망한 여성이 25년간 3000여 명에 이른다.

3년 전 14세 소녀 키아라 파에스가 남자친구에게 불법 낙태를 강요받다가 살해당한 사건이 이번 낙태 합법화 운동에 불을 지폈다. 하원을 통과한 법안 요지는 임신 14주 내의 모든 낙태를 합법화하는 것이었다. 시술 전 5일간 숙려를 의무화하고, 빈민층 임신부에게는 시술과 후속 의료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올해 초 앰네스티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유권자의 약 60%가 낙태 합법화에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보수 진영의 저항이 완강했다. 선대 교황들에 비해 상당히 진보적인 행보를 펼쳐 온 프란치스코 교황도 상원 표결을 앞두고 고국의 낙태 합법화에 뚜렷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아르헨티나 일간 클라린에 따르면 교황은 낙태 합법화를 반대하는 의원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동료 의원들을 설득하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낙태 합법화를 반대한 의원들은 대안 제시 없이 그저 ‘수정된 배아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지적했다. 표결 전 토론에서 한 여성 의원은 “법안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무조건 반대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표결 과정을 진행한 가브리엘라 미체티 부통령이 법안 지지 의견을 밝히는 의원에게 욕설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WP는 “3개 주에 편중된 인구 분포를 고려하지 않고 전국 24개 주에 동수의 의석을 배정하는 의회 제도가 여론에 반하는 상원 표결이 나온 원인이었다”고 분석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교황 모국 아르헨#낙태 합법화#법안 부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