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 고바야시, 일기에 기록
“전쟁책임론 지적 받는것 괴롭다”… 히로히토, 사망 2년전 속내 털어놔
히로히토 일왕이 자신의 전쟁 책임에 대해 만년에 이르기까지 고뇌했던 실상이 당시 시종의 일기를 통해 드러났다. 1988년 5월 아카사카 왕궁에서 열린 파티에서 손을 흔드는 히로히토 일왕. 동아일보DB
“가늘고 길게 살아봤자…. 전쟁책임 거론되는 것이 괴롭다.”
히로히토(裕仁) 전 일왕(재위 1926∼1989)이 자신의 전쟁책임에 대한 비판과 관련해 발언한 내용이 당시 시종의 일기에 기록돼 있었다고 교도통신이 23일 전했다. 통신은 히로히토 전 일왕 생전에 시종으로서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던 고바야시 시노부(小林忍·2006년 사망) 씨의 일기를 유족으로부터 입수했다.
일기에는 히로히토 전 일왕이 85세였던 1987년 4월, 자신의 거처에서 고바야시 시종에게 “업무를 줄이고 가늘고 길게 살아도 별것 없다. 괴로운 일을 보거나 듣거나 하는 일이 많아지게 될 뿐이다. 형제 등 친지가 세상을 뜨는 걸 보게 되고 전쟁책임을 지적 받는다”고 속내를 털어놨다고 적혀 있다. 고바야시 시종은 이를 ‘엊저녁 일’이라며 4월 7일란에 기록했다. 이어 일왕에게 “전쟁 책임은 극히 일부 사람이 말하는 것일 뿐 대다수 국민은 그렇지 않다. 전후 복구로부터 오늘날의 발전상을 보면 이제 과거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신경을 쓰지 마시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궁내청은 고령인 일왕의 업무부담 경감 방안을 검토 중이었다. 같은 해 2월에는 일왕의 동생인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가 세상을 떴다. 이미 공개된 선배 시종장의 같은 날 일기에도 “(일왕이) ‘장수해도 좋은 일 없다’고 하자 고바야시 시종이 위로했다”고 쓰여 있다고 통신은 전했다.
통신은 일기 내용에 대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경험한 히로히토 일왕이 만년까지 전쟁책임에 대해 마음을 쓴 심정이 드러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히로히토 일왕은 공식 회고록을 통해서는 태평양전쟁에 대해 “군부와 의회가 전쟁 결정을 내렸고, 입헌군주로서 재가했을 뿐”이라며 자신의 전쟁책임을 부정한 바 있다.
고바야시 씨의 일기에는 히로히토 전 일왕이 언제 누구에게서 전쟁책임에 대한 지적을 받았는지에 대한 기술은 없다. 다만 1986년 3월 당시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공산당의 마사모리 세이지(正森成二) 의원이 “무모한 전쟁을 시작해 일본을 전복 직전까지 가게 한 것은 누구인가”라며 히로히토 전 일왕의 책임을 추궁했고, 이를 부정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당시 총리와 설전을 벌인 바 있다.
히로히토 일왕은 이 같은 속내를 드러낸 지 20여 일 뒤인 4월 29일 자신의 탄생일 연회에서 구토하며 쓰러졌다. 같은 해 9월 수술을 받고 일시 회복했으나 1988년 9월 다시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1989년 1월 7일 세상을 떠났다.
고바야시 시종은 1974년 4월 일왕가의 시종이 돼 2000년 고준(香淳) 왕후 사망 때까지 26년간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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