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인생은 그의 말처럼 소신을 지키려는 용감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25일(현지 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히든밸리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82세로 눈을 감은 미국 공화당 존 매케인 상원의원(애리조나·6선).
그는 말기 뇌종양 소식이 알려진 지 9일 만인 지난해 7월 28일 ‘오바마케어(전 국민 건강보험법) 폐지’ 법안 찬반 투표가 진행 중이던 상원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혈전 제거 수술로 왼쪽 눈썹 위엔 아물지 않은 수술 자국이 선명했다. 그는 조용히 상원 투표 관리자들에게 다가가 오른손 엄지를 아래로 떨어뜨리며 “노”라고 말했다. 결국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공화당이 당론으로 밀던 오바마케어 폐지 법안은 1표 차로 부결됐다. 매케인은 “대체 입법이 없는 오바마케어 폐지는 반대한다”며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82년 공화당 하원의원, 1986년부터 6선 상원의원을 지낸 그는 ‘매버릭(독불장군)’이라고 불렸다. 뼛속까지 보수주의자였지만 때로는 당파 논리에 맞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냈다. 특히 그는 공화당 내 몇 안 되는 ‘트럼프 저격수’였다. 지난해 10월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수상한 그는 수상 소감을 통해 “어설프고 거짓된 민족주의를 위해 세계 리더십 의무를 거부하는 것은 비애국적”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했다. 올해 출간된 그의 회고록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미국의 가치를 못 지킨 인물”이라며 쓴소리를 했다.
하지만 그는 상대방을 음해하지는 않는 품격 있는 정치인이었다. 2000년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서 조지 W 부시에게 밀린 뒤 2008년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됐던 그는 민주당 후보 버락 오바마를 깎아내리지 않았다. 대선 출구조사 결과 패색이 짙자 그는 지지자들 앞에서 “흑인 대통령을 선출한 미국인은 위대한 국민”이라며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오바마를 돕겠다”며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쉽지 않은 싸움에 늘 뛰어들었던 그는 군인 출신이다. 1936년 미국령 파나마 운하를 지키는 코코솔로 해군기지에서 출생한 그는 해군 제독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1958년 졸업한 뒤 해군 전투기 조종사로 근무했다.
1967년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그는 폭격 작전 수행 중 전투기가 격추되면서 월맹(북베트남)에 전쟁포로로 붙잡혔다. 월맹은 이듬해 그의 아버지 잭 매케인이 미 태평양사령관이 되자 그의 석방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미군 수칙을 들어 “나보다 먼저 들어온 군인들이 나가기 전까진 나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는 5년 반 동안 수용소에서 모진 고문을 견뎠다. 자살 시도를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1973년 베트남전이 끝난 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전쟁 영웅’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싸움에선 결국 이기지 못했다. 지난해 말부터 의정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병마와 싸웠지만 24일 의학 치료 중단을 선택한 지 약 하루 만에 숨을 거뒀다.
전 세계에서 애도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에 “매케인 의원의 가족에게 가장 깊은 연민과 존경을 전한다”고 썼고, 백악관은 조기를 게양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우리는 서로 달랐지만 수 세대의 미국인과 이민자들이 지키기 위해 싸우고, 행진하고, 희생해온 이상을 공유해 왔다”고 전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26일 “고인은 한미 동맹의 굳은 지지자이며 양국 간 협력을 위해 노력해 왔다”고 밝혔다.
장례식은 워싱턴국립성당에서 거행되며 시신은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묘역에 묻힐 예정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추도 연설을 부탁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의 장례식 참석을 원치 않는다는 그의 뜻에 따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대신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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