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승인(approval)’ 없이는 한국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10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은 주권 침해 논란을 낳을 수 있는 민감한 내용이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이 표현을 순간적으로 세 번이나 반복했다. 비핵화 협상을 위한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워싱턴과의 충분한 조율 없이 남북관계 개선에 속도를 내지 말라는, 노골적인 트럼프식 공개 경고인 것이다.
○ 트럼프 대통령의 작심 경고, 왜?
외교부는 10일 국감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5·24조치 해제 검토 발언 파문이 확산되자 주한 미국대사관을 통해 미국 쪽에 별도로 해명했다. “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인 검토가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강 장관의 해명을 포함한 주요 내용이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됐다는 게 외교부의 설명.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이 통상 양국 간에 사용되는 외교적 표현인 ‘협의(consultation)’나 ‘동의(agreement)’가 아닌 ‘승인’이란 극히 비(非)외교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대응한 것은 한국의 대북 제재 해제 검토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이렇게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불만을 드러낸 것은 지난해 9월 6차 핵실험 직후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을 ‘유화책(appeasement)’이라고 비판한 후 1년여 만이다. 그만큼 평양 남북정상회담 전후로 수개월간 누적된 트럼프 행정부의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동안 워싱턴에서는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이 가시적인 진전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이 남북관계 개선에 너무 앞서 나간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설은 한미 당국이 충돌했던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는 미국 측과의 충분한 협의 없이 80t에 이르는 석유와 비품을 북한으로 반출했다가 뒷수습에 부심하며 두 차례나 개소 목표일을 연기했다. 유엔사의 불허로 8월 한 차례 무산된 남북 철도·도로 공동점검 계획은 아직까지 한미 간 합의가 마무리되지 못한 상태. 그런가 하면 앞서 7월 북한산 석탄 반입 사건은 대북 제재 공조를 유지해왔던 한국이 막상 ‘제재 구멍’ 아니냐는 의구심까지 낳기도 했다.
평양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남북군사합의서에 대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거친 항의는 한미 간 정보 공유도 완전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강 장관은 남북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걸려온 폼페이오 장관의 전화를 받고 40분간 그의 성난 질문 세례에 답해야 했다. 강 장관의 설명을 들은 폼페이오 장관은 같은 날 저녁이 돼서야 정중한 목소리로 다시 전화를 걸어 미국 내부 상황이 정리됐음을 알렸다.
○ 앞서 나가는 남북관계 속도에 공개 견제구
이런 미국의 견제는 북한과의 비핵화 ‘빅딜’을 앞두고 협상력을 끌어올려야 하는 시점에 대북 제재 고삐가 풀리지 않도록 쐐기를 박겠다는 것이다. 북한이 제재 완화를 본격적으로 요구하며 북-중-러 3각 공조를 강화하는 상황에서 다른 나라도 아닌 한국이 ‘코털’을 건드리자 경계심과 불만이 뒤섞여 폭발했다는 것.
외교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날 발언에 대해 말을 아꼈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양국 간 협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나온 ‘트럼프 대통령식 발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평소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 화법 등을 감안했을 때 표현 자체는 크게 신경 쓰지 말라는 취지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물밑에서 쌓여 온 미국의 불만이 해소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한미 공조 파열음이 나오거나 더 커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지금부터는 정부의 대북정책 속도 조절이 정말로 중요하다”며 “정부가 너무 앞서 나가면 미국은 대북 제재 위반 혐의가 있는 국내 기업들에 대한 세컨더리 보이콧(제3자 제재) 카드까지 꺼내 들지 말란 법도 없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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