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은 ‘진짜배기(the real deal)’입니다. 굉장한 인물이에요. 진짜배기입니다.”(2016년 11월·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 당선인)
당선인 신분으로 뉴저지주 베드민스터의 자기 소유 골프장에서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에 대한 면접을 마친 트럼프 대통령은 기다리고 있던 취재진 앞에서 이처럼 흥분 섞인 칭찬을 늘어놨다. 매티스 장관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신뢰는 굉장했다. 공개 석상에서도 공공연하게 그의 별명인 ‘미친 개(mad dog)’를 언급하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매티스 장관이야말로 ‘힘을 통한 평화’라는 자신의 정책 기조를 실현시킬 적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토록 뜨거웠던 트럼프 대통령의 감정은 2년 후 식어버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14일(현지 시간) 방송된 CBS ‘60분’ 인터뷰에서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매티스 장관)가 일종의 ‘민주당원’이라고 생각한다. 떠날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공개적으로 매티스 장관의 사임 가능성을 밝힌 것이다.
매티스 장관은 16일 베트남행 비행기에 동승한 기자들에게 “15일 아침 트럼프 대통령과 직접 통화했다. 대통령이 ‘나는 당신을 100% 지지한다’고 말했다”며 불화설을 일축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매티스 장관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는 언론 보도는 지난달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15일 “대통령은 마음속으로 매티스 장관이 민주당원이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당장 매티스 장관이 그만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셈이다.
연말에 사임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니키 헤일리 주유엔 미국대사와 비슷하게 연말 해임설이 나도는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 그리고 민주당원이라는 딱지가 공개적으로 붙어버린 매티스 장관과 백악관의 ‘규율’을 잡겠다는 당초의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충성파’에 밀려버린 존 켈리 비서실장까지. 트럼프 행정부 핵심 참모들의 ‘3차 엑소더스’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본격적으로 나오고 있다. 핵심 참모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이탈했던 지난해 여름(1차)과 올봄(2차)에 이어 11·6 중간선거가 끝난 뒤에 ‘물갈이’가 이뤄질 거란 관측이다.
대통령과 이런저런 마찰을 빚은 참모들이 대통령의 ‘공개 비난’ 속에 결국 백악관을 떠나는 흐름의 골격은 과거의 ‘엑소더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집권 후반기에 접어드는 트럼프의 모습은 임기 초에 비해 분명히 달라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연이은 참모들의 사임 관련 소식에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혼란상’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며 이를 오히려 ‘친정 체제’ 구축을 위한 기회로 삼으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백악관 생활에 적응한 그가 능숙하게 ‘사임 정국’을 통제하고 있는 모양새다.
○ 참모 이탈 ‘위기’ 능숙하게 대응하는 트럼프
지난해 여름 ‘1차 엑소더스’ 국면은 혼란 그 자체였다. 탈출 행렬은 지난해 7월 21일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나약하다”는 비판을 수차례 받은 숀 스파이서 대변인이 사표를 던지면서 시작됐다. 이틀 후인 23일엔 라인스 프리버스 비서실장이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트윗 해고’를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달 31일엔 앤서니 스캐러무치 신임 공보국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욕설을 내뱉은 사실이 드러나 임명 열흘 만에 해임됐다. 백악관의 한 축을 담당하던 스티브 배넌 수석전략가도 약 보름 뒤인 8월 18일 사임했다. 폭풍처럼 몰아친 참모들의 연속 이탈에 트럼프 백악관은 ‘혼란의 온상’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올 3월 시작된 ‘2차 엑소더스’도 만만치 않았다. 3월 13일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트윗 해고’를 당했고, 9일 뒤인 22일엔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을 지나치게 가르치려 든다며 마뜩지 않아 했던 허버트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이 물러났다. 호프 힉스 공보국장(3월 29일)과 게리 콘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4월 2일)의 사임이 숨 돌릴 틈도 없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가장 최근 참모들의 사임 관련 소식에 대응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은 사뭇 달라졌다. 감정의 폭발을 자제하고 참모들의 동시 다발적 이탈을 직접 막았다. 오히려 위기를 진정시켜 반(反)트럼프 세력에 ‘먹잇감’을 주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9일 사의를 공개한 헤일리 대사를 백악관 오벌오피스(집무실)로 초대해 대사직을 내려놓기로 결정한 배경을 직접 밝히도록 배려한 것이 대표적이다. 헤일리 대사는 유엔 무대에서 충직하게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대변했지만,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트럼프의 의중과는 다르게 반(反)러시아 성향을 드러내는가 하면 트럼프의 성추문을 폭로한 여성들을 옹호하는 등 심기를 여러 차례 거스른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의도된 ‘특별대우’를 통해 트럼프 행정부의 ‘혼란상’ 논란을 잠재웠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이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환송식’이 신선했다는 듯 9일 사설에서 “헤일리 대사는 오벌오피스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따뜻한 환송을 받았다. ‘트럼프 시대’에 참모들이 백악관을 주로 떠나는 방식은 아니었다”고 전했다.
지난해 제임스 코미 당시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해임 국면에서 로드 로즌스타인 법무부 부장관이 대통령과의 대화를 몰래 녹음하는 방안을 검토했고, 수정헌법 25조(대통령 직무수행 불능 여부 판단과 승계 절차에 관한 조항)를 발동하자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직무박탈 추진을 언급했다는 NYT 보도가 나온 뒤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그를 해임하지 않았다. 1, 2차 엑소더스 당시와 같았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시사주간지 뉴요커는 NYT가 로즌스타인의 해임을 유도해서 민주당 유권자들의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해당 보도를 흘렸다고 생각해 트럼프 대통령이 그를 자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참모들의 이탈로 비롯될 수 있는 위기를 관리하는 그의 정치기술이 발전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충성파’에 목마른 트럼프, ‘위기관리’ 넘어 ‘친정체제’ 구축
헤일리 사임 파장을 ‘집무실 초대’ 카드로 덮어버린 트럼프 대통령은 중간선거 이후 매티스 장관과 세션스 장관이 실제로 자신을 떠나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비슷한 방식으로 ‘잡음 최소화’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논란을 성공적으로 잠재우고 ‘자기 사람들’로 빈자리를 채운다면 ‘친정 체제’가 강화될 공산이 크다.
매티스 장관이 행정부를 떠나면 기존에 ‘백악관 어른들’로 불리며 트럼프 대통령의 충동적인 성향을 견제한 것으로 평가받는 인사들은 거의 전멸하게 된다. 맥매스터 보좌관과 콘 NEC 위원장 등이 모두 백악관을 떠난 데 이어 매티스 장관마저 떠나면 유일하게 존 켈리 비서실장이 ‘어른들’의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켈리 실장마저도 18일 ‘충성파’의 한 축인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과 백악관에서 고성과 욕설을 주고받는 말다툼을 벌였다는 현지 언론의 보도가 나온 뒤 사임이 임박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국방장관, 법무장관, 그리고 비서실장이란 요직에 ‘소신파’ 대신 ‘충성파’를 앉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트럼프 백악관 내부 혼란상을 폭로한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WP) 기자의 책 ‘공포’ 발간과 익명의 고위 당국자가 트럼프 대통령의 ‘저항군’ 역할을 하고 있다는 NYT 기고문 발표가 지난달에 집중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충성파’에 대한 갈증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높아졌다. ‘공포’에 따르면 매티스 장관과 켈리 실장은 모두 트럼프 대통령의 ‘저항군’에 가까운, ‘충성파’와는 거리가 먼 인사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CBS ‘60분’ 인터뷰에서 “워싱턴은 잔혹한 곳”이라며 “백악관의 모든 사람을 신뢰하진 않는다”라고 말했다. 헤일리 대사의 후임으로 장녀 이방카가 어떻겠느냐는 질문에 그럴 가능성은 없다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방카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은 절대 배신하지 않을 사람들을 백악관과 내각에 모아두고 집권 후반기를 시작하고 싶다는 의지가 담긴 발언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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