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연금 키우는 호주, 투자수익률 좋아 높은 신뢰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3일 03시 00분


[세계는 지금 연금 개혁중]<3>노령연금 보완하는 호주

“시간도 되고 관심도 있어 늦게나마 법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기업연금이 없었다면 이런 행운은 꿈도 꾸기 어려웠을 겁니다.”

호주 시드니공대 캠퍼스에서 만난 이언 나이트 씨는 만학을 결심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그는 호주의 ABC방송 PD 출신으로 현재 이 대학 법대 대학원에 다닌다. 그는 “2012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퇴직하게 돼 공부를 시작했다”며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버는 수입과 연간 4만 호주달러(약 3200만 원)의 기업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금액이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재직 당시 기여금 비율은 연봉의 7.2% 수준이었지만 그는 자발적으로 12.8%를 더 냈다. 노후를 위해 조금 더 적립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기업연금의 운용 수익률이 높았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며 웃었다.

○ 기업연금이 은퇴 후 소득 보완

호주에서 은퇴 후에 지급되는 노령연금은 격주로 단독가구는 최대 916.30호주달러(약 73만3000원), 부부가구는 1381.40호주달러(약 110만5000원)이다. 또 소득이 많으면 노령연금의 일부를 삭감하고 지급한다. 노령연금만으로는 여유로운 생활이 어렵다는 뜻이다. 이를 보완해 주는 것이 기업연금이다.

기업연금은 1983년 로버트 호크 노동당 정부가 연금 개혁을 추진하면서 도입했다. 원래는 일부 기업에서 사내 복지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도입했던 것이 노후 소득을 높이기 위한 정책으로 바뀐 것. 호주 정부는 1992년 기업연금 도입을 의무화했다. 현재 정규직 근로자들은 대부분 기업연금에 가입된 상태. 호주 교포인 미셀 조이스 씨는 “아르바이트 학생을 고용해도 기업연금에 가입시켜야 한다”라고 소개했다. 종업원 한두 명을 고용하는 자영업자들이나 가족기업도 당연히 가입 대상이다.

호주 기업연금은 한국의 퇴직연금과 대체로 비슷하다. 회사가 기여금 전액을 근로자의 기업연금 계좌에 적립한다. 현재 기여금 비율은 연봉의 9.5% 이상. 호주 정부는 이를 2025년까지 12%로 높여 나갈 예정이다. 일부 대기업은 이미 이 비율을 20% 수준으로 높였다. 나이트 씨처럼 근로자 스스로 기여금을 더 내 연금 주머니를 키우는 일도 많다. 정부도 세제 혜택 등을 제공하며 이를 권장한다.

덕분에 노령연금과 기업연금을 동시에 받는 노인들은 비교적 여유로운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다. 노인 대상 컴퓨터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시니어컴퓨터클럽협회장 낸 보슬러 씨는 “주변 노인들 중 생활고를 겪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기업연금이 풀어야 할 숙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시드니공대 연구원 정용문 박사는 “한국처럼 호주에서도 기업연금으로 매달 받는 금액이 크지 않다면서 일시금으로 찾는 은퇴자가 적잖다”며 “연금 기능을 제대로 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부러움 사는 수익률…기금 간 경쟁 치열

호주 기업연금이 국내 퇴직연금과 비슷해 보이지만 운영 방식은 많이 다르다. 한국은 회사가 직접 금융기관과 퇴직연금 운용 및 자산관리 계약을 체결하는 계약형 제도다. 반면 호주는 사용자로부터 독립된 기금을 설치해 운영하는 기금형 방식이다. 이 기금은 개별 기업 단위 또는 특정 산업 분야 기업들이 공동으로 설립할 수 있다.

기금 운영을 책임지는 수탁법인 이사회에는 노사 대표와 연금자산 운용 전문가가 참여한다. 펀드 평가회사 모닝스타 호주법인 앤서니 세란 이사는 “전문가가 참여해 투자 전략을 세우기 때문에 주식이나 인프라 등 위험자산의 투자 비중이 높고 다양한 포트폴리오로 구성돼 있어 운용 수익률이 높은 편”이라고 귀띔했다. 올해 6월 말 기준 최근 5년간 평균 수익률은 9.0%에 이른다. 같은 기간 국내 퇴직연금의 수익률은 2.39%에 불과하다.

기금 간 수익률 경쟁도 치열하다. 호주기업연금기금협회(ASFA) 로스 클레어 연구담당 이사는 “정부가 수익률이 좋지 않은 기금에 대해서는 다른 기금과의 합병을 권유하기 때문에 각 기금은 수익률 향상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개별 근로자들도 기금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 수익률이 안 좋은 기금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기금 관리 및 운용에 따른 비용이 많다는 점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기업연금 가입자들이 대부분 자기 계좌의 포트폴리오를 잘 모르는 점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다행인 점은 기업연금 관련 금융기관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기업연금 기금 운용 규모 4위의 자산운용사 IFM인베스터스는 올해 9월 초 연간 운용보수의 7.5%를 투자자들에게 환원하기로 해 눈길을 끌었다. 이 회사 로빈 밀러 투자심의위원회 및 리스크관리위원회 위원장은 이 같은 결정 배경을 묻는 질문에 “투명한 투자 문화 조성에 기여하기를 기대한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호주인들의 기업연금에 대한 신뢰도는 높은 편이다. 호주자산운용협회 앨런 한셀 이사는 “일부 논란은 있지만 장기적으로 투자 수익률이 좋았던 덕분에 기업연금 제도 자체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기업연금이 호주 금융산업 발전에 기여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ASFA 마틴 파이 회장은 “기업연금이 호주 금융시장에 미친 긍정적인 효과는 많다”며 “공항이나 도로, 항만 건설의 종잣돈이 됐고, 주식시장 발전의 토대가 됐으며 외국 자본 의존도를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자랑했다.


▼“위험 낮고 수익률 높은 인프라에 적극 투자”▼

기업연금 기금이 설립한 IFM 로빈 밀러 리스크관리위원장

“우리 회사는 세계적으로 드문 소유 구조를 바탕으로 기업연금 제도의 발전과 함께 성장해 왔다.”

로빈 밀러 IFM인베스터스 투자심의위원회 및 리스크관리위원회 위원장(사진)은 동아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투명한 투자 문화 조성을 목표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산을 운용한 결과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호주 멜버른 본사에 있는 그와의 인터뷰는 시드니 지사에서 화상통화로 이뤄졌다. 푸근한 인상의 그는 “갑자기 심한 두통이 생겨 시드니에 직접 가지 못했다”며 양해를 구했다.

IFM은 1994년 호주의 기업연금 기금 27곳이 출자해 만든 회사이다. 연기금이 직접 자산운용사를 설립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주주이자 고객인 기업연금 기금의 이익과 회사 이익을 일치시키려는 취지다. 덕분에 회사 이익을 위해 무리한 투자를 감행해 고객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6월 말 현재 이 회사의 운용자산은 1070억 호주달러(약 88조2300억 원). 고객은 모두 연기금이나 국부펀드 등 기관투자가들이다. IFM은 인프라 투자에 매우 적극적이다. 밀러 위원장은 “인프라 투자는 위험이 낮고 수익률은 높은 데다 사회에 좋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일거양득”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한국과 일본은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투자 문화를 갖고 있지만 최근 들어 인프라 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귀띔했다. IFM은 지난해 말 서울사무소를 개설하고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IFM의 채권 부문 대표를 지낸 그는 1975년부터 10년간 광산공학자로 일하다 투자은행 쪽으로 옮긴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IFM과는 1999년 업무 협력 관계로 처음 인연을 맺었고, 2007년에 아예 IFM에 합류했다. 그는 인프라 투자 채권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드니=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연금#퇴직연금#기업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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