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현지 시간) 미국 전역에서 발매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인 미셸 여사의 자서전 ‘비커밍(Becoming)’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미셸 여사의 자서전이 올해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될 것이 확실하다”고 전했다.
올해는 유난히도 미국 정치에 관한 헤비급 책들이 많이 발간된 해다. 특히 WP 기자 밥 우드워드의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와 언론인 마이클 울프의 ‘화염과 분노’는 큰 화제가 되며 출판계를 휩쓸었다. 하지만 미셸 여사의 자서전은 이 책들을 가볍게 누르고 압도적 1위에 올랐다. 앞으로 2, 3개월 동안은 뉴욕타임스(NYT)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자서전을 출판한 반스앤드노블은 “2015년 ‘앵무새 죽이기’의 작가 하퍼 리의 두 번째 소설로 화제가 됐던 ‘고 셋 어 워치맨’ 이후 가장 빨리, 가장 많이 팔려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서평도 호평 일색이다. ‘주제 의식이 선명하고 글솜씨가 뛰어나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일독한 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녀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생동감 있는 글쓰기라는 것이다. 미셸 여사의 자서전은 공식 발매되기도 전에 ‘오프라의 북클럽’에 선정됐으며 윈프리가 운영하는 ‘O’ 매거진에 상당 부분이 발췌돼 수록됐다.
전문가들은 미셸 여사의 자서전의 인기 요인으로 ‘미셸이 주인공’인 점을 꼽는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미국 대통령 부인 자서전은 남편의 통치력을 자랑하거나 실정(失政)을 변호하는 데 대부분을 할애해 대통령 자서전인지, 대통령 부인 자서전인지 분간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반면 미셸 여사의 자서전은 그녀가 유년시절과 백악관 생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와 실수들도 솔직히 고백했다. 그런 점에서 자서전 제목 ‘Becoming(뭔가 되어 나간다는 것)’은 미셸 여사의 정체성 찾기 여정과 딱 맞아떨어진다는 평을 듣고 있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커니 슐츠는 WP 인터뷰에서 “미국 역사상 지금까지 이런 대통령 부인 자서전은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미셸 여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흑인 여성’, ‘일과 가정을 양립하는 여성’이라고 정의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앵그리 블랙 우먼(화난 흑인 여성)’이라는 낙인을 찍으려는 보수파 정치인과 언론 매체들에 맞서 ‘유머감각이 있고, 인내심이 많고, 외모와 패션센스가 뛰어난 여성’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 노력했다고 밝혔다. 미셸 여사는 한 공화당 여성 정치인이 자신의 엉덩이가 큰 것까지 트집 잡으며 놀렸을 때 진짜 화가 났지만 웃어넘겼다고 고백했다.
미셸 여사는 정치인의 아내로서 겪어야 했던 ‘성 불평등’ 문제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받고 야망을 가졌지만 남편이 사회적으로 승승장구하는 동안 자신은 집에 남아 육아와 가정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불평등한 구조였다는 것. 미셸 여사는 “이게 과연 내가 원하던 것이었나”라는 의문을 수차례 가졌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우리 부부는 결혼 카운슬러와의 상담을 통해 가정 운영 방식을 바꿨다”며 “나와 아이들은 더 이상 남편을 기다리지 않게 됐다. 아내와 아이들의 생활을 따라잡는 것이 남편의 의무가 됐다”고 밝혔다.
미셸 여사는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때 “혼란과 분노를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개표를 지켜보다가 남편에게 ‘자러 가겠다’고 말하고 위층 침실로 갔지만 도저히 잘 수 없었다. 나는 이 상황(트럼프 당선)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꼬박 밤을 새웠다”고 밝혔다.
워싱턴 정가 일각에선 미셸 여사에게 2020년 대선에 출마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녀도 그런 요청이 있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서전 서두에서 딱 잘라 말했다.
“여기서 직접 밝히겠다. 나는 공직(대통령)에 출마할 의도가 없다. 전혀.”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막말과 분열 정치에 질린 미국인들은 미셸 여사의 대권 도전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13일 자서전 발매와 함께 시작된 전미 북투어가 마치 대선 출정식처럼 성대하게 열리는 것이 미셸 지지자들의 열망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북투어 개시 테이프를 끊은 도시는 오바마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시카고다. 프로농구팀 시카고 불스의 안방구장인 유나이티드센터에서 윈프리가 미셸 여사와 현 정치 상황에 대한 대담을 진행했다. 할리우드 스타 리스 위더스푼 등도 출연했다.
이 행사는 참가료가 최고 2750달러(약 312만 원)에 달했지만 금방 매진됐다. 미셸 여사의 북투어는 다음 달 19일까지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워싱턴, 필라델피아, 브루클린(뉴욕), 디트로이트, 덴버, 새너제이, 댈러스 등 10개 도시에서 열린다. 뉴욕과 워싱턴에서는 두 차례씩 열린다. 대서양 건너 영국 런던(12월 3일)과 프랑스 파리(12월 5일)에서도 개최될 예정이다. 미셸 여사의 자서전은 초판으로만 300만 부를 찍어 세계 31개 언어로 동시 출간됐다.
미셸 여사의 자서전이 큰 지지를 받으면서 다른 미국 대통령 부인들의 자서전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셸 여사의 자서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1989년 발간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40대)의 부인 낸시 여사의 자서전도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그녀의 자서전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험담으로 가득해 ‘읽고 나면 우울해진다’는 평을 받았다. 낸시 여사는 레이건 행정부 관료들, 전임 대통령들, 기업가들에 대해 최악의 평가를 내렸으며 심지어 그녀의 자녀와 손자들도 험담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낸시 여사의 자서전 제목이 ‘My Turn(내 차례)’이 아니라 ‘My Burn(내가 달달 볶은 사람들)’이 돼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그래도 잘 팔려서 3개월간 NYT 베스트셀러 목록에 머물렀다.
가장 많은 품을 들인 대통령 부인 자서전으로는 린든 존슨 대통령(36대)의 부인 레이디 버드 여사의 자서전이 꼽힌다. 그녀는 대통령 부인 시절 백악관에서 테이프레코더를 들고 다니며 기록을 남기는 취미를 가졌는데 나중에 녹음 내용을 문자로 풀어보니 무려 200만 단어에 달했다. 그녀는 방대한 내용을 꼼꼼하게 30만 단어 수준으로 줄여서 자서전을 출간했다.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급작스레 백악관 안주인이 된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풀어내 재미없는 남편의 자서전보다 훨씬 많이 팔려나갔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32대)의 부인인 엘리너 여사는 4권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인권운동과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쳤던 그녀는 자서전 4권 모두에서 개인사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고 국제정치에 대한 무미건조한 내용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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