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넘어 세계 감동시킨 무협소설계 巨星…‘중국의 셰익스피어’ 김용

  • 신동아
  • 입력 2018년 11월 17일 11시 28분


왼쪽부터 김용 소설 천룡팔부, TV 드라마 의천도룡기(1986), 신조협려(2006). 수많은 작품을 남긴 중국 무협소설 작가이자 언론인인 김용(본명·査良鏞)이 10월 30일 홍콩에서 별세했다. 향년 94세. [사진제공·홍콩 헤리티지박물관]
왼쪽부터 김용 소설 천룡팔부, TV 드라마 의천도룡기(1986), 신조협려(2006). 수많은 작품을 남긴 중국 무협소설 작가이자 언론인인 김용(본명·査良鏞)이 10월 30일 홍콩에서 별세했다. 향년 94세. [사진제공·홍콩 헤리티지박물관]
“중국인이 있는 곳에는 그의 작품이 있고, 중국인이 모인 곳 대화 주제는 그의 작품이다.”

10월 30일,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한 작가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중국의 셰익스피어, 동양의 톨킨으로 불린다.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연구하는 학회가 있고 대학 전공과목도 개설됐다. 논문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작품 공인(公認) 판매 부수는 1억 부 이상. 1억 부 클럽(정본 판매 집계가 1억 부 이상 작가 클럽)에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 거장, ‘해리포터’ 저자 조앤 롤링, 추리소설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 법정 스릴러 대가 존 그리셤과 더불어 이름을 올렸다. 중국 내에서 그의 작품 발행부수를 뛰어넘는 책은 1964년 발간된 최고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 어록 ‘소홍서(小紅書)’ 정도다. 이런 그의 별칭은 ‘신필(神筆)’, 이름은 ‘김용(金庸·진융)’이다.

김용 작품은 현대 고전 반열에 올랐다. 1980년대 무협소설 붐을 일으킨 ‘영웅문(英雄門) 3부작’을 필두로 우리나라에도 ‘김용 마니아’가 적잖다. 한국이 세계저작권협약에 가입하기 전인 1986년 해적판을 출판했던 출판사는 800만 부 이상 판매고를 기록했다. 김용이 세상을 떠나자 한국 독자들도 거성(巨星)의 서거를 애도하고 있다.

‘무협소설의 태두’ 김용은 1924년 3월, 중국 저장(浙江)성 하이닝(海寧)현 위안화(袁花)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자량융(査良鏞), 하이닝현의 자(査)씨 가문은 명문거족이었다. 청(淸) 강희제(康熙帝) 때 문신으로 ‘경업당집(敬業堂集)’을 남긴 자신행(査愼行)이 그의 직계 조상이다. 가문은 명(明)·청(淸) 교체기 22명의 진사(進士·과거 합격자)를 배출했다. 강희제가 자씨 집안을 두고 “문중에 진사가 열 명, 숙질 중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다섯 명”이라 감탄할 정도였다.

학자, 작가 집안의 후예

김용 당대에도 가문의 명성은 이어졌다. 사촌형 자량자오(査良釗)가 국립쿤밍사범학원(國立昆明師範學院) 원장, 국립대만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또 다른 사촌 형 자량젠(査良鑑)은 법률가로 대만 행정원 법무부장과 최고법원장을 지냈다. ‘낙엽(落葉)’ ‘우연(偶然)’ 등을 쓴 ‘중국 현대시의 개척자’ 쉬즈모(徐志摩)도 집안 사람이다. 김용의 친형 자량정(査良錚) 또한 ‘무단(穆旦·목단)’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저명 시인이다.

이처럼 ‘묵향(墨香) 가득한 집’에서 태어난 김용은 유년 시절을 책 속에서 보냈다. ‘사서삼경’ ‘제자백가’ 등 유교 경전에 더해 불교·도교 경전까지 섭렵했다. 이때 익힌 동양고전이 훗날 작가로 성장하는 토양이 됐다.

김용은 1938년 저장성립연합고중 중학부에 입학했고, 이듬해 동기생들과 ‘급투고초중자(給投考初中者·중학생 입시를 위한 참고서)’를 출판했다. 당시 중학생 참고서로서는 최초였고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나 3년 후인 1941년 김용은 퇴학을 당하고 만다. 학교 훈도(訓導)주임의 투항주의를 풍자한 글 ‘아려사만유기(阿麗絲漫遊記)’를 벽보로 게재한 게 문제가 됐다. 그의 재능을 아낀 학교장 권유로 저장성 취저우중학(衢州中學)으로 전학한 김용은 이 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국민당이 당(黨)·정(政) 간부 양성을 위해 설립한 중국국민당중앙정치학교(中國國民黨中央政治學校·대만국립정치대 전신) 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김용은 급진 개혁주의자로, 국민당의 학생 통제 행위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다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당시 중앙정치학교 교장을 겸임한 장제스(蔣介石) 대만 총통과도 거리를 두게 된다. 자유인이 된 김용은 중앙도서관 임시 사서로 일하며 각종 책을 두루 탐독했고, 1945년 일본 패망 후 고향으로 돌아와 항저우(杭州) 동남일보(東南日報)에서 외신 번역 일을 맡았다.

[바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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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용’의 탄생


1946년 김용은 개신교계 명문대 쑤저우대학(蘇州大學·현 대만 동오대) 법학원에 편입해 국제법을 전공하고 1948년 졸업했다. 쑤저우대학 시절 상하이(上海) 대공보(大公報)에 입사, 국제부 외신 번역기자로 일하다 졸업 후 홍콩지사에 발령받았다.

1950년 김용은 청운의 꿈을 품고 ‘신(新)중국(중화인민공화국)’ 수도 베이징(北京)으로 갔다. 출중한 영어 실력을 살려 정무원(현 국무원) 외교부에서 일했으나, 공산당 이념과 대외정책은 그와 맞지 않았다. 외교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다시 홍콩 대공보로 돌아갔고, 1952년 신만보(新晩報)로 자리를 옮겨 부편집장(偏執副刊)을 맡았다.

신만보 시절 김용은 평생 지기(知己) 천원퉁(陳文統)을 만난다. 김용과 동갑인 그는 역시 명문학자 집안 출신으로 문재(文才)가 있었다. 필명 ‘양우생(梁羽生·량위성)’으로 1952년 첫 무협 작품 ‘용호투경화(龍虎鬪京華)’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의 재능을 알아본 신만보 편집장 뤄푸(羅浮)는 신문에 무협소설을 연재할 것을 제안했다. 이때부터 김용은 본명 자량융(査良鏞)의 마지막 자를 파자(破字)해 ‘김용(金庸·진융)’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김용과 양우생의 첫 작품은 1955년작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이다. ‘청 건륭제(乾隆帝)가 실은 옹정제(雍正帝)의 친아들이 아니며, 건륭제에게는 만주족이 아닌 하이닝성 출신 한족(漢族)의 피가 흐른다’는 야사를 모티프로 했다. 건륭제 후궁 중 위구르족 공주로서 ‘몸에서 향기가 난다’고 해 향비(香妃)라 불린 함향공주(含香公主) 이야기도 담겨 있다. 한족과 이민족의 갈등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독자 사이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56년 김용은 두 번째 소설 ‘벽혈검(碧血劍)’을 홍콩상보(香港商報)에 연재하며 인기를 이어나갔다. 명(明) 멸망의 원인이 된 ‘이자성(李自成)의 난’을 배경으로 명나라 마지막 천자 숭정제(崇禎帝)에게 살해당한 명장 원숭환(袁崇煥)의 아들 원승지(袁承志)가 무림(武林)에서 무공을 갈고닦아 아버지의 복수를 꾀한다는 줄거리다. 이 작품 또한 대성공을 거뒀다.

이를 발판으로 김용은 1957년 새로운 작품을 또 내놨다. 북송(北宋)이 여진족 금(金)과 벌인 전쟁에서 패한 뒤 남송(南宋) 건국, 주전파와 주화파의 갈등, 칭기즈칸의 몽골 통일과 송 멸망 등까지를 시대 배경으로 한 ‘사조영웅전(射英雄傳)’이다. 실제 역사·지리·인물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무협소설의 지평을 대하역사소설로까지 넓혔다는 평가를 받으며 또 한 번 큰 인기를 모았다. 이후 영화, TV드라마, 컴퓨터게임으로 각색되고, 중국과 구미 각국에서 대학 교재로 사용되기도 한 수작이다.

언론사주로 변신


김용(왼쪽에서 두 번째)과 영화 ‘신조협려’ 주연 배우들. [사진제공·홍콩 헤리티지박물관]
김용(왼쪽에서 두 번째)과 영화 ‘신조협려’ 주연 배우들. [사진제공·홍콩 헤리티지박물관]
작가로서 명성을 공고히 하던 김용은 자기 작품을 대중에게 더 널리 알릴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개인 매체를 창간한 것이다. 1959년 그는 홍콩에서 명보(明報)를 창간, 발행인·사장·주필을 겸했다. 이때부터 낮에는 신문사 경영자 겸 편집자로, 밤에는 무협소설 작가로서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매체 발간을 맡은 김용은 1959년 신작 ‘신조협려(神俠侶)’를 명보에 독점 연재했다. 전작 ‘사조영웅전’ 속편으로 시대 배경은 몽케 칸과 쿠빌라이 칸의 남송 침공기다. ‘사조영웅전’에서 사망한 양강의 아들 양과가 아버지 죽음을 둘러싼 은원(恩怨)을 알아가고, 사회적 관습을 뛰어넘어 스승 소용녀와 사랑을 이루고자 투쟁한다. 장르적으로는 로맨스물로, 작품 구성의 치밀성과 등장인물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특히 여성 스승과 남성 제자의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사랑은 당시 매우 파격적인 소재로 여겨졌다. ‘신조협려’는 훗날 독자에게 “최고 무협소설은 아니더라도 최고 연애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용은 ‘신조협려’ 인기에 힘입어 1959년 ‘설산비호(雪山飛狐)’도 선보였다. 만 하루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하지만 등장인물의 회상과 내레이션을 통해 수개월, 수년, 수십 년 전 사건이 ‘이야기’로 재현되는 액자소설이다. 한 화자 이야기를 다른 인물이 반박하고, 다른 인물이 또다시 반박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모든 인물 이야기를 종합해야만 전체 줄거리를 알 수 있다는 점, 작품 결말을 독자 상상에 맡기는 ‘열린 결말’을 취했다는 점 등 때문에 김용 무협소설 중 독특한 작품으로 꼽힌다.

이듬해인 1960년 김용은 ‘설산비호’ 속편 ‘비호외전(飛狐外傳)’ 연재를 시작했다. 전작 주인공 호비(胡斐)의 10대 시절을 다룬 작품이다. ‘사조영웅전’부터 ‘설산비호’ ‘비호외전’까지 연달아 성공하면서 신생 매체 명보는 치열한 홍콩 언론계에서 금세 입지를 다졌다.

1961년 김용은 다시 명보에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연재를 시작했다. 훗날 ‘사조영웅전’ ‘신조협려’와 더불어 ‘사조삼부곡(射三部曲)’으로 불리는 시리즈 마지막 작품이다. 시대 배경은 원(元)말 명(明) 초, 원 마지막 황제 혜종(惠宗) 토곤테무르 재위기다. 전작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 주요 인물인 곽정·황용 부부가 주인공이다. 송 멸망 후 한족이 원나라에 맞서고자 제작한 신비의 병기 ‘의천검’과 ‘도룡도’를 둘러싸고 무림 고수들이 벌이는 암투, 강호 세계의 은원, 한족과 몽골족의 갈등 등을 다뤘다.

역사와 상상의 만남


영화 ‘소오강호’의 한 장면.
영화 ‘소오강호’의 한 장면.
‘의천도룡기’의 특징은 원대한 스케일이다. 중심이 명교(明敎·중국에 전래된 마니교를 기원으로 하는 비밀 종교 조직)여서 서역 페르시아까지 작품 배경으로 등장한다. 김용이 기존에 즐겨 다룬 화이(華夷·한족과 이민족) 갈등에 더해 중동(中東)의 이국 색까지 가미한 이 작품은 비밀종교 집단을 중심으로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해 김용 소설 중 역사적 사실과 가장 거리가 먼 것으로 평가받는다. 일각에서는 ‘역사적 개연성 부족’을 비판하지만 사건의 개연성, 등장인물 묘사, 인물 관계의 치밀성 등은 탁월해 사조삼부곡 중 단연 백미로 꼽힌다.

이 여세를 몰아 김용은 1961년 장편 ‘원앙도(鴛鴦刀)’, 단편 ‘백마소서풍(白馬嘯西風)’ 등도 연달아 썼다. 원앙도는 원도(鴛刀)와 앙도(鴦刀)라는 길고 짧은 칼 한 쌍을 차지하면 천하무적 무공을 지니게 된다는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는 ‘인자무적(仁者無敵)’ 메시지를 전하며 끝을 맺는다.

‘백마소서풍’은 김용 소설 중 유일하게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으로 서역 한 마을에 버려진 한족 소녀 이문수(李文秀)의 성장과 사랑 이야기다. 서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1963년 김용은 무림 세계를 떠나 불법 세계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때 발표한 작품 ‘연성결(連城訣)’은 불가에서 말하는 탐욕(貪慾) 진에(瞋) 우치(愚癡), 즉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는 욕심과 노여움,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독(毒)을 주제로 삼았다. 작품 도입부에서 주인공 적운이 모함을 받고 투옥되는 상황 묘사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연상시킨다. 실제로는 김용이 어린 시절 집에서 일하던 종 ‘화생’에게 들은 기구한 과거사를 모티프로 한 것이다.

김용은 역시 1963년 불법(佛法)을 지키는 여덟 신장(神將)인 천(天)·용(龍)·야차(夜叉)·건달바(乾婆)·아수라(阿修羅)·가루라(迦樓羅)·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羅迦)를 소재로 한 ‘천룡팔부(天龍八部)’도 선보였다.

북송과 거란족 사이 요(遼) 분쟁기를 시대 배경으로 삼은 작품으로, 거란인이면서 한인으로 자란 비극적 영웅 소봉, 무예를 싫어하면서도 수많은 절기를 몸에 익히는 단예, 파계한 소림사 승려 허죽, 멸망한 ‘대연국’의 후예로 왕조 부흥을 꿈꾸는 모용복 등 네 젊은이가 주인공이다. 화려한 무공 묘사가 압권이다.

본명이 ‘개잡종(狗)’인 석파천을 주인공으로 한 1965년작 ‘협객행(俠客行)’도 인기를 끌었다. 시인 이백(李白)의 동명 시를 제목으로 삼은 이 작품은 세상 물정을 잘 모르지만 품성 바르고 순수한 주인공이 강호의 사건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20세기 중국 대표 소설가

1967년 김용은 린칭샤(林靑霞·임청하)의 명연기로 널리 알려진 영화 ‘동방불패’의 원작이라 할 수 있는 ‘소오강호(笑傲江湖)’를 세상에 선보였다. 소오강호는 등장인물 유정풍과 곡양이 만든 소(蕭·피리)와 금(琴·거문고)의 합주곡. 문자적 의미는 ‘강호의 속박을 비웃는다’는 뜻이다. ‘정(正)과 사(邪)의 대립은 모호하다’는 작품 주제를 상징한다. 정파(正派)와 사파(邪派)의 의견 차이에 구애하지 않고 우정을 지켰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는 무림들의 상황을 풍자한 제목이다. ‘동방불패’는 이 작품 속 일월신교 교주로 절대 무공을 지닌 존재다. 고전소설 전통을 이어받아 권선징악에 입각한 줄거리가 많은 김용 소설 중 드물게 허무적이고 비극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이다. 역사적 배경도 불명확하다.

3년 후인 1970년 김용은 춘추시대 오(吳)나라에 복수를 다짐한 월(越)왕 구천과 충신 범려 앞에 뛰어난 검술과 지혜를 가진 여인이 나타나 오를 멸망시키는 걸 도왔다는 ‘월녀(月女) 전설’을 모티프로 한 소설 ‘월녀검(月女劍)’을 완간했다.

1972년에는 김용 최후의 대작 ‘녹정기(鹿鼎記)’를 마무리했다. 3년간 계속한 연재의 결실이다. 청 최전성기를 시대 배경으로 삼아 강희제(康熙帝) 등 실존 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허구적 상상력과 절묘하게 엮어 쓴, 이른바 ‘신필(神筆)’의 최고 경지를 보여준 작품이다.

‘녹정기’를 마지막으로 김용은 더 이상 새로운 소설을 쓰지 않았다. 출간한 작품을 개작해 재출간하는 데 집중했다.

언론사 사주로서 회사 경영과 사업 확장에도 매진했다. 명보 자매지로 석간 명보만보(明報晩報), 월간 명보월간(明報月刊), 주간 명보주간(明報週刊) 등을 잇달아 창간했다. 출판계로 영역을 넓혀 명보출판사, 명창(明窓)출판사를 설립했다. 1991년 지주회사인 명보기업유한공사를 세워, 언론사 최초로 홍콩증권거래소에 상장하기도 했다. 당시 명보그룹 순이익은 1억 위안(元)에 달했고, 상장 직후 김용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1994년은 김용에게 기념비적인 해였다. 그해 5월 김용 전작 15종 36권이 ‘김용작품집’으로 공식 출판됐다. 그해 중국 ‘독서잡지(讀書雜志)’는 20세기 중국 대표 소설가를 꼽으며 루쉰(魯迅), 선충원(沈從文), 바진(巴金)에 이어 김용을 네 번째로 올렸다. 베이징대(北京大學)에서 명예교수직도 받았다. 옌자옌(嚴家炎) 베이징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명예교수직 수여식에서 “김용의 창작 실천은 또 하나의 문화대혁명이고, 조용히 진행된 혁명”이라고 상찬했다. 이듬해 베이징대에 ‘김용 소설 연구’ 과목이 정식 개설됐다.

사나이는 그저 껄껄 웃을 뿐

홍콩 헤리티지 박물관에 있는 김용 갤러리. [사진제공·홍콩 헤리티지박물관]
홍콩 헤리티지 박물관에 있는 김용 갤러리. [사진제공·홍콩 헤리티지박물관]
상업적 성공, 문학적 성취에 더해 언론사업 성공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김용은 노년에 향학열을 불태웠다. 2005년 81세의 나이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2010년 86세 때 역시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각국 정부 훈장도 받았다. 1981년 영국 OBE훈장(외국인대상 명예훈장)을 시작으로 1992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2000년 홍콩정부 최고훈장(Grand Bauhinia Medal), 2004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코망되르장 등을 받았다.

김용은 삼류 통속소설로 치부되던 무협소설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 받는다. 옌자옌 베이징대학 교수는 그의 문학적 성취를 “아(雅·순수문학)와 속(俗·대중문학) 쌍방의 문학 경험을 흡수하고, 이를 바탕으로 아와 속을 초월한 것”이라며 “구체적으로 네 가지 업적을 달성했다”고 설명했다. △삶과 오락을 동시에 달성하고 통일했다. △사실주의라는 주류 예술 사조에 비범한 상상력을 결합했다. △전통 백화문(白話文· 당대에 발생하여, 송·원·명·청 시대를 거치면서 확립된 구어체 중국어) 소설 형식과 언어를 유지·개조·창신(創新)했다. △순수문학과 대중(통속)문학의 벽을 깨고 진정한 아속공상(雅俗共賞·식자와 서민이 함께 감상하고 즐기는 것)을 달성했다는 것이다.

신이 내려준 필력으로 정(正)파와 사(邪)파를 넘나들며 ‘문학 강호’를 통일한 김용은 생전 누린 부와 명예를 뒤로하고 자연 섭리에 따라 세상을 떠났다. 저세상에서 그는 “만물은 웃기를 좋아하고 속세의 영예를 싫어하니(蒼生笑不再寂寥), 사나이도 그렇게 어리석고 어리석어 껄껄껄 웃는다(豪情仍在癡癡笑笑)”는 영화 ‘소오강호’ 주제곡 가사처럼 ‘모든 것은 덧없다. 나는 그저 웃기를 좋아할 뿐’이라며 함박웃음 짓고 있을 것 같다.

최창근 객원기자 caesare21@hanmai.net

<이 기사는 신동아 2018년 12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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