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현지 시간) 오전 11시경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있는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모빌아이 본사의 지하 1층. 10대 정도의 차량에 낯선 기계장치들이 잔뜩 달려 있었다. 개발자들이 이 기계장치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방문객으로 보이는 중국인 15명도 장치들을 보며 이것저것 물었다.
모빌아이는 차량용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다.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주목을 받았다. 이 기술은 자율주행차를 구현하기 위한 핵심 기술이다. 지난해 초 모빌아이는 글로벌 소프트웨어기업인 인텔에 153억 달러(약 17조5600억 원)에 팔리며 다시 한 번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다. 이스라엘 기업의 인수합병(M&A) 금액으로 최대였기 때문이다. 2016년 기준 매출 3억8000만 달러(약 4200억 원), 직원 수 600여 명인 작은 스타트업이 창업 20년 만에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길 아얄론 모빌아이 디렉터는 회사의 성공비결로 “1999년 예루살렘의 작은 아파트에서 시작한 기업이 이처럼 빠른 시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스타트업을 키워주는 정부의 지원과 대학에서 오는 인재라는 두 박자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 ‘창업국가’ 동력은 R&D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2018년 인구가 845만 명에 불과하다. 면적은 한국의 약 21% 수준이다. 하지만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과 세계경제포럼(WEF)이 최근 발표한 ‘2018 기업혁신역량지수’에서 이 나라는 1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조사 대상 63개국 중 31위였다.
이스라엘엔 글로벌 기업의 연구개발(R&D)센터 350여 개가 들어서 있다. 매년 기술개발에 성공한 수많은 이스라엘 스타트업이 M&A되며 국부를 창출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지난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만270달러로 세계 20위였다.
1948년 건국된 이스라엘이 원래부터 경제부국이었던 것은 아니다. 인접 국가들과의 지속적인 갈등 관계로 군수업이나 농업 위주의 경제구조가 지속됐다. 변화는 1990년대에 일어났다. ‘요즈마펀드’로 국내에 널리 알려진 정부 주도의 기업 투자가 이른바 ‘창업국가’로 이스라엘을 탈바꿈시켰다.
요즈마펀드가 1998년 민영화된 뒤 이스라엘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기업의 R&D다. 지난달 22일(현지 시간) 찾은 이스라엘혁신청은 이 같은 업무를 관장하는 곳이다.
이스라엘의 관문인 벤구리온 국제공항에서 차로 불과 15분 거리에 있다. 이곳은 이스라엘혁신청 외에도 AT&T 등 무수한 글로벌 기업의 사무실이 밀집해 있다. 한국의 판교테크노밸리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비 루브톤 이스라엘혁신청 시니어 디렉터는 “이스라엘혁신청은 최근 기술 인큐베이터 시스템에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술 인큐베이터 시스템은 개별 기업에 2년 동안 운영되는 R&D 지원 사업이다. 1991년 시작돼 현재 연간 5000만 달러의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다. 주로 군수업에 종사하던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이 1990년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분위기에 따라 대량 실직을 하자 스타트업으로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루브톤 시니어 디렉터는 “기술 인큐베이터 시스템은 특정 분야나 기업에 예산을 집행하도록 미리 정해두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쟁 입찰을 통해 선발된다는 뜻이다. 시스템에 선발되면 개별 기업은 R&D에만 매진하면 된다. R&D 비용의 85%를 국가에서 부담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15%도 벤처캐피털(VC)이 낸다. VC는 대신 기술에 대한 지분 30∼50%를 가져간다. 기술 개발에 성공하면 정부는 3%가량의 로열티만 받는다. 그 대신 정부는 3개월에 한 번씩 해당 기술의 전문가를 통해 성과를 검증한다. 루브톤 시니어 디렉터는 “민간이 스스로 해도 되는 일을 정부가 굳이 할 필요가 없다”면서 “민간이 투자하기 힘든 고위험군 R&D에 이스라엘 정부가 주로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전직 총리까지 스타트업 컨설팅
이스라엘에는 ‘트누파’라는 스타트업 창업 지원 프로그램도 있다. 역시 이스라엘혁신청이 운영하고 있다. 트누파는 창업 과정에서 필요한 종잣돈(최대 5만 달러)을 제공하며 각종 사업개발 서비스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렇게 성장한 기업 중 20%가 기술 인큐베이터 시스템의 혜택을 받는 수준의 기업으로 큰다.
시스템보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사회적 분위기다. 이스라엘의 모든 대학은 ‘대학 내 기술연구소(OTT·Office Of Technology Transfer)’를 운영하고 있다. 대학에 들어오는 기부금이 적은 대신 이들 연구소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대학을 운영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최고 명문대로 꼽히는 히브리대의 ‘이숨(Yissum)’이 대표적인 OTT다. 모빌아이도 이숨에서 성장한 기업이다.
전직 총리까지 기업 육성에 힘을 보태고 있다는 사실도 이스라엘의 ‘창업 우선 DNA’를 잘 보여준다. 2006∼2009년 총리를 지낸 에후드 올메르트 EOC 대표가 그 사례다. 그가 산업노동부 장관 시절 추진한 요즈마펀드는 벤처캐피털 업계의 자금 공급 원천이 됐다.
올메르트 전 총리는 최근 EOC라는 컨설팅 회사를 이끌면서 ‘제너시스 에인절스’를 비롯한 스타트업들이 VC로부터 투자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최근엔 이스라엘 스타트업에 한국 자본들이 투자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EOC는 요즈마펀드를 운영하는 요즈마그룹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회사다. 올메르트 전 총리는 “이스라엘의 스타트업과 혁신을 위해 일하고 있다. 한국은 경제 분야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스타트업은 충분하지 않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과 이스라엘의 차이점으로 실패를 바라보는 시각을 꼽았다. 그는 “성공할 때까지 시도하는 것이 스타트업”이라고 강조했다. 시장에 잠재적인 변혁을 가져올 수 있다면 10번을 시도하더라도 이스라엘에선 투자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올메르트 전 총리는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정부가 스타트업을 이해하고 있어야 된다”며 “규제 역시 시장에 맞춰서 조정하는 역할에 그쳐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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