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 사회를 보노라면 이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3일 미 권력서열 3위인 하원의장에 두 번째로 오른 낸시 펠로시(79), 지난해 12월 31일 2020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한 엘리자베스 워런(70) 상원의원, 연방대법관 9명 중 최고령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86), 미 상원의원 100명 중 최고령인 다이앤 파인스타인(87), 여성 최초 겸 아프리카계 최초로 하원 금융서비스위원장에 오른 맥신 워터스(81) 등만 봐도 그렇다.
70, 80대 여성의 영향력과 힘이 이토록 센 이유는 뭘까. 이들은 왜 편안히 여생을 보낼 나이에 자식 및 손주뻘에 밀리지 않는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는 걸까. 미국을 흔드는 ‘할머니 파워’는 청춘을 새로 정의할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알리고 있다.
●고령화
미 럿거스대 여성정치센터(CAWP)에 따르면 3일 출범한 제 116회 미 의회에서는 전체 상·하원 535 석 중 24%인 127명이 여성이다. 특히 하원의원은 102명(민주 89명, 공화 13명)으로 여성 의원 수가 100명을 넘은 것은 이번이 최초다.
눈에 띄는 고령 여성은 1983년부터 36년 째 하원의원으로 재직 중인 마시 캅터(73)와 78세에 초선으로 당선된 도나 샬레일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당시 백악관 정책고문으로 일하다 하원에 입성한 캅터 의원은 지난해 3월 미 역사상 최장 기간 하원에 재직한 여성 의원이 됐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 마이애미대 총장 등을 역임한 샬레일라 의원도 기존 최고령 기록과 불과 한 달차로 미 역사상 두 번째 고령 초선 의원이 됐다.
언론도 이들을 주목한다. 최근 뉴욕타임스(NYT)는 고령 여성의 활약상 증가를 분석한 기사에서 “완전히 새롭고 더 강한 노년 여성 세대가 도래했다”고 했다. NYT가 분석한 ‘할머니 파워’의 이유는 △고령화 △1960~70년대 미 여성 권익 운동 △미투(#MeToo·나도 당했다) 확대 등이다.
2016년 기준 미 여성의 평균 수명은 81.1세로 남성(76.1세)보다 다섯 살 많다. 하버드대 경제학자 클라우디아 골딘과 로렌스 카츠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 미 65세~69세 여성 중 불과 15%만 일을 했지만 2016년에는 이들 중 3분의 1이 직장을 갖고 있다. 같은 기간 70~74세의 여성 노동 참여율도 8%에서 18%로 늘었다.
●여성운동과 미투
이들은 2차 세계대전 전후인 1930년~1950년대 태어나 서구 페미니즘의 최절정기였던 1960~197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다. 당시 서구를 휩쓴 여성 운동·68혁명 등을 직접 경험하고 목격했다. 피임약 개발로 성 혁명이 시작되고, 결혼 후 자신의 성을 유지하는 여성이 늘어났던 것도 바로 이때부터. “여성이 아내와 엄마 외에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베티 프리던의 책 ‘여성의 신비’ 등도 유행이었다. 여성 권익 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가질 토양이 마련돼 있었던 셈이다.
2017년부터 전 세계를 강타한 미투 운동도 이들의 활동에 힘을 실어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고령 여성에 대한 책을 집필중인 수잔 더글라스 미시간대 교수는 “미투 운동은 고령 여성의 경험과 가치에 대한 재평가를 이뤄냈다”며 “이들은 ‘나는 여전히 힘이 넘치고, 할 일도 많다. 더 이상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일을 참지 않겠다’고 외친다”고 진단했다.
●헌신적 외조
이들의 오랜 활약에는 동시대 여성들이 누리지 못했던 개인적 행운도 따랐다. 월등한 수준의 고등 교육을 받았고 교수, 법률가 등 전문직 커리어를 쌓았으며 탄탄한 재정적 기반도 보유했다. 코넬·하버드·컬럼비아란 명문대를 섭렵한 긴즈버그 대법관은 자서전에서 “1940년 대 미 여성이 얻을 수 있는 타이틀은 ‘학사(BA·Bachelor of Art)가 아니라 ’부인(Mrs.)‘이었다”고 토로했다.
남편의 헌신적 지원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긴즈버그는 21세 어린 나이에 남편 마틴 긴즈버그(2010년 사망·변호사)와 결혼했다. 한 해 뒤 첫 딸도 출산했다. 마틴은 1950년대에 결혼한 사람 중 드물게 가사와 양육에 적극적이었다. 결혼 당시 그 역시 학생이었지만 아내의 로스쿨 진학을 독려했다. 긴즈버그의 로스쿨 학비도 백화점 임원이던 시부모가 댔다.
마틴은 아내가 법관으로 근무할 때 아내의 서기를 위한 도시락까지 직접 쌌다. ’애 딸린 아줌마‘ 긴즈버그가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해 모든 미 법률가의 꿈인 대법관에 오른 배경이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결혼 초 아내가 굉장히 요리를 못 하더라. 개선 여지도 안 보였다. 그래서 내가 요리를 맡았다”고 했다. ’내 가장 중요한 업무는 아내가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워런 상원의원의 남편 브루스 만 하버드대 교수(69)도 마찬가지. 1980년 결혼해 39년째 해로하고 있는 그는 부인이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1남 1녀를 같이 키웠다. 자신과 결혼해도 전 남편의 성 ’워런‘을 고수하겠다는 부인의 뜻도 허용했다.
펠로시 의장의 남편 폴 펠로시(79)는 수천 만 달러의 재산을 보유한 부유한 사업가. 다섯 아이를 키우던 전업주부 펠로시가 47세에 하원의원이 된 건 남편 지인의 선거 운동을 돕다 뒤늦게 자신의 적성과 재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시대로 더 각광
할머니 파워를 주도하는 인사들이 반(反) 트럼프 진영에 몰려 있다는 것도 눈에 띈다. 워런 상원의원은 민주당 내 반 트럼프 인사 중에서도 가장 ’강성‘으로 꼽힌다. 그는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트럼프 후보와 ’얼간이‘ ’깡패‘ 같은 막말 공격을 주고받았다. 미 언론은 종종 그를 ’싸움꾼(fighter)‘으로 묘사한다.
워터스 하원 금융서비스위원장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을 주장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워런 의원을 ’포카혼타스(미 원주민 추장 딸)‘, 워터스 의원은 ’저지능(low IQ)‘이라고 불러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여성 차별적 언행과 태도로 종종 비판받아온 트럼프 대통령이 역설적으로 이들의 주가를 높여주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통령과 설전을 벌이는 정치인에게는 더 많은 주목과 관심이 쏠리고 자신의 ’급‘ 또한 올라가기 때문. 인지도와 유명세 등에서 상당한 반사이익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수의 여성 정치인들은 지난해 중간 선거 당시 “트럼프에 대한 분노로 선거에 뛰어들었다”고 해 주목을 받았다.
3일 하원의장 취임 일성으로 “대통령 탄핵도 피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한 펠로시 의장도 마찬가지. 백악관과 민주당은 국경장벽 건설 논란으로 지난해 12월 21일부터 미 역사상 가장 긴 ’연방정부 업무정지(셧다운)‘ 대치를 벌이고 있다. 이로 인해 지지율이 하락세인 트럼프 대통령과 달리 펠로시 의장의 지지율은 상승 중이다. 15일 워싱턴포스트(WP)는 펠로시의 호감도가 지난해 11월 중간선거보다 8%포인트 오른 35%라고 전했다.
●’센 할머니‘에 대한 찬반양론
이들의 ’센캐(센 캐릭터)‘ 면모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한다. 분명한 노선과 주장에 환호하는 이도 있지만 ’독하다‘ ’할 만큼 오래 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끊임없이 나온다. 특히 이른바 ’잘난 여자‘에 대한 대중의 선입견과 비호감은 이들이 부딪치는 가장 큰 과제. 동시에 이들이 정치적으로 지지를 확보해야 하는 진보 성향 젊은층조차 이들의 재력과 엘리트 커리어를 이유로 ’기득권‘이라고 외면한다.
펠로시 의장은 지난해 11월 당내 경선을 앞두고 당시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또 펠로시냐”는 비판을 받았다. 긴즈버그 대법관도 마찬가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시절부터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그가 새 세대에게 자리를 넘겨줘야 한다‘며 은퇴를 종용하는 분위기가 나온다.
역사상 유례없는 할머니 파워를 이뤄낸 이들은 과연 ’기득권‘ ’엘리트‘ ’꼰대‘ 이미지를 벗고 언제까지 질주할 수 있을까. 이들의 청춘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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