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보기술(IT) 기업 벨페이스의 남성 직원 니시지마 유조(西島悠?·31)는 하루종일 8㎝짜리 굽이 달린 여성 펌프스를 신고 지냈다. 그는 하루종일 똑바로 걷지도 못했다. 앉으나 서나 다리엔 고통뿐이었다.
니시지마는 29일자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여성 사원들이 펌프스를 신고 영업현장에 가는 것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이처럼 ‘힐 체험’을 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펌프스란 끈이나 고리가 달리지 않은 형태의 굽 있는 여성 구두를 말한다.
그는 “여성이 외근영업이 아니라 사무직을 희망하는 배경에는 이런 고생이 있었을 수 있다”면서 “당연히 여기고 있던 게 정말 옳았던 건지 생각해보자”는 내용의 호소문을 이달 초 한 구직사이트에 올리면서 이목을 끌었다.
◇“다들 신으라니까 피곤해도 신어요” “일하려면 5㎝ 힐 신으래요”
아사히신문은 이 일화를 전하면서 최근 일본에서 여성이 펌프스를 신도록 강요하는 풍조에 저항하는 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일부 여성들은 펌프스 착용을 추천받거나 권고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월 중순 도쿄(東京)에서 열린 기업 합동 취업설명회에서는 여학생 대부분이 굽있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고 신문은 전했다. 그 중 한 여대생은 “취업 세미나에서도, 신발 가게에서도 펌프스를 신으라고 해서 샀다. 피곤하지만 몸가짐에 신경쓰는 기업도 있을테니 어쩔 수 없다”고 토로했다.
펌프스 착용을 강제하는 직장도 있었다. 배우 겸 작가인 이시카와 유미(石川優?·32)는 최근 장례전문가 전문 인력파견회사에 등록했다. 하지만 파견처로부터 높이 5㎝정도의 굽있는 펌프스를 신으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에 부당함을 느낀 이시카와는 지난 1월 자신의 트위터에 “남성 직원들은 걷기 쉬워 보인다. 일에 보람을 느끼기에 신발을 이유로 그만두고 싶진 않다. 성별에 따라 원치 않는 것을 강제하는 건 성차별이라고 생각한다”는 게시물을 올렸다.
이 게시물은 3만회 이상 공유됐다. 소셜미디어(SNS)상에서는 일본어로 신발을 뜻하는 ‘구쓰’(靴)와 고통이라는 의미의 ‘구쓰’(苦痛), 성희롱 고발 운동인 ‘미투’(#MeToo) 등 여러 단어를 결합한 ‘구투’(#KuToo)라는 해시태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2월에는 인터넷 서명운동도 일어났고 여기엔 1만7000명이 참여했다.
◇실제 채용에선 영향 없지만 “분위기 읽는 능력”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채용 과정에서 여성의 ‘펌프스 착용’ 여부를 크게 고려하지 않는 기업들도 많았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지난 2월 도쿄 취업설명회에 참가한 기업 9곳 중 8곳은 펌프스 착용이 채용 여부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답했다. 신발의 형태보단 청결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단 1곳만이 펌프스 착용이 채용과 관련이 있다고 답했다. 취업지원업체에 다니는 한 30대 남성은 “(구직자가)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지, 그 자리에 맞는 복장을 선택할 수 있는지 등을 고려할 때 여성의 힐 착용도 봐야 할 요소”라고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힐은 여성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히라요시 히로코(平芳裕子) 고베대 교수는 18세기 당시 상류층 남성들이 우아함과 위엄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굽있는 구두가 유행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흰 스타킹과 빨간 하이힐을 신고 찍은 초상화를 언급했다.
하지만 근대 이후 남성이 밖에서 일하고 여성은 가정을 지키는 역할 분담이 일어난 뒤, 아름답게 차려입는 것이 여성스러움과 결부되기 시작했다고 히라요시 교수는 부연했다.
히라요시 교수는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성별을 둘러싼 가치관이 변하고 있으며 지금 힐에 의문의 목소리가 나오는 건 필연적인 흐름”이라면서 “여성이 힐을 벗어도 좋고, 남성이 각선미를 자랑해도 좋다. 성별과 관계없이 개인의 자유로운 치장에 관대한 사회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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