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작년 영업익 약 260조원… 어마어마한 이익에 각국 투자가 밀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27일 03시 00분


86년 베일 벗은 사우디 국영기업 아람코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도시 주아이마에 위치한 아람코의 대형 가스·석유 플랜트 모습. 사진 출처 아람코 홈페이지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도시 주아이마에 위치한 아람코의 대형 가스·석유 플랜트 모습. 사진 출처 아람코 홈페이지
1933년 설립 후 86년간 베일 속에 가려졌던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10일 아람코는 120억 달러(약 13조9200억 원)의 채권을 발행했다. 사우디 국부펀드가 소유한 세계 4위 석유화학업체 사빅을 인수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채권 발행을 앞두고 아람코는 총 469쪽의 투자설명서를 공개했다. 이를 통해 아람코의 지난해 영업이익이 무려 2238억 달러(약 259조6000억 원)임이 밝혀졌다. 어마어마한 이익에 놀란 각국 투자자가 아람코 채권을 사겠다며 앞다퉈 몰려들었다. 응찰 금액만 1000억 달러(약 116조 원)일 정도로 투자 열기가 뜨거웠다. 아람코가 실적공시 의무가 없는 비(非)상장 기업이기도 하지만 사우디 정부가 아람코를 국유화한 1980년 이후 실적 정보를 일종의 국가 기밀처럼 취급한 것도 투자자들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각국이 아람코를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히 이 기업의 괴물 같은 실적 때문은 아니다. 왕실 후계 구도, 세계 에너지 산업은 물론 중동 역학 관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개 기업이 어떻게 이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

○ “정부보다 아람코를 더 신뢰”

아람코는 아라비안 아메리칸 석유회사(Arabian American Oil Company)의 약칭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1933년 5월 사우디 왕실과 미국 스탠더드오일이 공동 설립했다.

당시 탐사팀은 5년간 허허벌판 사막을 헤집고 다녔지만 유전 발굴에 실패했다. 거의 포기하려던 찰나 1938년 동부 해안도시 다란에서 첫 유전을 찾았다. 지금도 아람코의 본사가 있는 곳이다. 1957년 인근 가와르에서 세계 최대 육상 유전(일 생산량 380만 배럴)까지 발견됐다. 사업은 쑥쑥 성장했고 사우디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됐다.

사우디 정부는 1980년 미국 지분을 인수하며 아람코를 100% 국영화했다. 이후 운영 정보도 전혀 공개하지 않았다. 아람코가 번 돈이 정부 재정은 물론 왕실 수입의 원천이기 때문. “국민 전체가 아닌 왕실만 호의호식한 것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을 의식한 탓으로 보인다.

투자설명서를 통해 공개된 실적은 상상을 초월했다. 블룸버그, 포브스 등에 따르면 지난해 매출 3559억 달러(약 412조8400억 원), 순이익 1111억 달러(약 128조8800억 원), 배당금 582억 달러(약 67조5100억 원)이다. 한 기업의 실적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안창용 주사우디 한국대사관 상무관은 “국가 경제 전체가 아람코가 내는 세금과 배당금 등에 의존한다. 아람코는 사우디아라비아 그 자체”라고 진단했다.

이에 10일 회사채 발행 때 아람코 채권 금리가 사우디 국채보다 낮은 기현상도 벌어졌다. 아람코는 이날 3년(2.75%), 5년(2.875%), 10년(3.50%), 20년(4.25%), 30년(4.375%) 만기 채권 총 5종을 발행했다. 발행 금리는 모두 같은 만기의 사우디 국채보다 조금씩 낮았다. 일종의 이자인 채권 금리는 수요가 많을수록 떨어진다. “사우디 정부보다 아람코란 회사를 더 신뢰한다”는 투자자 심리가 반영됐다.

○ 포트폴리오 다변화 시급

이렇게 막대한 돈을 버는데도 아람코는 왜 굳이 채권까지 발행해 사빅을 인수하려 할까. 이는 세계 석유시장의 판도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세계 경제 둔화와 셰일가스 등 대체에너지 급부상으로 ‘기름’만 팔아서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시대가 오고 있다.


1970년대 연평균 약 6.0%씩 증가했던 세계 석유 수요 성장세는 1980년대 2.0%, 최근 1.0%대까지 떨어졌다. 발전 및 산업용 연료는 석유보다 생산원가가 낮은 석탄 및 원자력에 밀린 지 오래고, 난방용 연료 시장도 천연가스에 잠식당했다. 전기차 보급이 늘면서 차량용 석유 수요까지 줄고 있다. 일각에서 “국제 유가가 100달러를 넘는 ‘고유가 시대’는 다시 올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아람코는 원유 생산 외에 천연가스 개발, 원유 정제 사업 등도 하고 있지만 수익의 절대 다수는 여전히 원유 생산에서 나온다. 투자설명서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원유 및 가스를 생산하는 소위 ‘업스트림(upstream)’ 부문과 석유화학 제품 관련 ‘다운스트림(downstream)’ 부문의 매출 비중은 각각 전체 매출의 72%, 28%다.

이 기형적 구조는 국제 유가에 따라 실적이 요동치도록 만들었다. 영국 런던 선물거래소 브렌트유가 40달러 선에 머물던 2016년에는 매출 1350억 달러(약 156조6000억 원), 순이익 130억 달러(약 15조800억 원)였다. 국제 유가가 70달러 선이던 지난해 실적에 비하면 매출은 37%, 순이익은 11%에 불과하다. 유가 변화에 따라 실적이 롤러코스터를 타니 ‘석유로 번 돈’으로 ‘탈(脫)석유를 준비하는’ 사업 다각화가 절실할 수밖에 없다. 아람코가 사빅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전방위적 인수합병(M&A) 및 합작사 설립을 추진하는 이유다.

핵심 사업인 원유 생산 효율을 높이는 데도 상당한 투자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아람코의 경쟁력은 생산성 향상이 아닌 지천에 널린 원유 그 자체에 기댄 부분이 컸다. 서구 석유회사처럼 장비 및 기술 고도화, 인재 양성 등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뜻이다.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더 많은 원유를 가진 세계 최대 원유 보유국 베네수엘라만 봐도 알 수 있다. 경제난과 정쟁(政爭) 등으로 지난달 국영 석유업체 PDVSA는 나이지리아 원유를 수입했다.

○ 채권 발행은 IPO 전초전

아람코 이사회 의장은 칼리드 팔리흐 에너지산업광물자원부 장관(59)이다. 1979년 아람코에 입사해 2015년까지 약 40년간 이 회사만 다닌 ‘아람코 맨’. 2009∼2015년 아람코 최고경영자(CEO)도 지낸 그는 무엇보다 왕실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34)의 최측근으로 유명하다. 아랍 언론은 그를 ‘살만의 오른팔’ ‘왕실 금고지기’ 등으로 부른다. 살만 왕세자가 팔리흐 장관을 통해 사실상 아람코 경영을 좌지우지하는 모양새다.


미 CNBC 등에 따르면 팔리흐 장관은 24일 수도 리야드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10일 채권 발행은 ‘시작에 불과하다(only the beginning)’. 향후 금융시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겠다”고 밝혔다. 금융 전문가들은 이 발언이 2021년으로 예상되는 아람코의 기업공개(IPO)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주식시장 상장은 채권 발행보다 훨씬 많은 돈을 한 번에 모을 수 있지만 그 반대급부가 만만치 않다. 정기 실적 공시와 회계 감사는 물론이고 지배구조 개선, 기후변화 대책, 노동자 권리 보호, 배당 요구까지…. 86년간 ‘어둠의 경영’을 해 온 아람코 역사를 감안할 때 사우디 정부가 이런 요구를 쉽사리 수용할지 의문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번 채권 발행으로 잠재적 투자자들이 아람코가 돈을 잘 번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아람코가 번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 더 알고 싶어 한다”고 평가했다.

이를 감안할 때 팔리흐 장관의 발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아람코를 상장하겠다”는 살만 왕세자의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FT 등에 따르면 세계 투자은행(IB) 업계는 아람코의 기업 가치를 최대 2조5000억 달러(약 2901조 원)로 추산한다. 사우디 정부가 목표하는 대로 지분 5%만 팔아 1000억 달러(약 116조 원)만 모아도 역사상 최대 IPO가 확실시된다. 이전 세계 최대 IPO였던 2014년 중국 알리바바 상장(218억 달러)의 약 5배다. 벌써부터 미국 뉴욕, 영국 런던, 일본 도쿄, 싱가포르, 홍콩 등 각국 증권거래소의 유치 경쟁 및 IPO 주간 업무를 따내기 위한 유명 IB들의 경쟁이 뜨겁다.

○ “이란 견제해 명실상부한 패권국 노린다”

살만 왕세자는 2016년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향후 20년 안에 사우디를 석유에만 의존하지 않는 나라로 만들겠다”며 국가 개조 프로젝트 ‘비전 2030’을 내놨다. 당시 국내총생산(GDP)의 16%였던 광공업, 물류, 금융 등 비(非)석유 부문 비중을 2030년까지 50%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었다. 홍해 주변 사막에 신도시를 짓는 ‘네옴(Neom) 프로젝트’, 리야드에 세계 최대 공원을 건설하는 ‘그린 리야드 프로젝트’ 등도 그 일환이다.


당시 살만 왕세자는 아람코의 2018년 상장 계획도 밝혔었다. 상장을 통해 얻은 돈으로 이 ‘비전 2030’에 드는 막대한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정보 공개를 이유로 일부 왕실 인사가 난색을 표하고 상장 시점, 장소, 공모가에 대한 정부 내 합의도 지연됐다. 이 와중에 살만 왕세자의 개입 의혹이 끊이지 않는 지난해 10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까지 겹쳤다. 결국 지난해 상장은 이뤄지지 못했다.

아람코 상장으로 얻은 돈이 경제사회 개혁에만 쓰이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달 초 미 CNN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입수한 위성사진을 분석해 리야드 외곽의 실험용 원자로 건설 소식을 전했다. 지난달 로이터도 “미국 정부가 미 기업의 원자력 기술을 사우디에 판매할 수 있도록 비밀리에 허가했다. 시아파 맹주 이란을 견제하기 위한 행보”라고 보도했다. 지난해 살만 왕세자는 미 CBS와의 인터뷰에서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사우디도 망설이지 않고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라고 했다.

22일 미국이 “다음 달 2일부터 이란산 원유 수입 금지 예외 조치를 중단한다”며 이란의 원유 수출을 사실상 봉쇄하자 사우디는 즉각 찬성했다. 이틀 후에는 테러 혐의로 사형이 선고된 자국민 37명에 대한 사형도 집행했다. 이들 대부분은 시아파 신자로 사우디 정부가 이란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아람코 IPO는 단순히 사우디 개혁의 근간을 넘어 ‘세계의 화약고’ 중동 정세에도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아람코의 진짜 위력은 엄청난 실적이 아니라 일개 기업의 움직임이 국제 지정학적 긴장을 고조시킬 변수라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 에쓰오일의 최대주주, 현대오일뱅크 2대주주… 국내서도 존재감 막강 ▼

한국과 인연 깊은 아람코
1970년대부터 중동 건설 主 발주처… 최근 원전 수주 놓고 韓-美-러 각축



국내 4위 정유업체 에쓰오일은 아람코의 한국 자회사다. 아람코는 1991년 당시 쌍용양회가 보유했던 쌍용정유 지분 35.0%를 인수했다. 외환위기 당시 쌍용그룹이 해체될 때 지분 28.4%를 추가로 사들여 에쓰오일의 최대주주가 됐다. 현재 아람코가 보유한 에쓰오일 지분은 63.5%에 달한다.

아람코는 3위 현대오일뱅크의 2대 주주이기도 하다. 아람코는 이달 15일 현대중공업지주가 보유한 현대오일뱅크 지분 17%를 약 1조4000억 원에 사들이며 현대중공업지주에 이은 2대 주주로 올라섰다. 동시에 현대중공업지주는 보유 중인 현대오일뱅크 지분 2.9%에 대한 콜옵션(우선주를 보통주로 바꿀 수 있는 권리)도 아람코에 부여했다. 아람코가 이 콜옵션을 행사하면 보유 지분이 최대 19.9%까지 늘어난다.

국내 1위 정유업체 SK이노베이션도 간접적으로 아람코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2015년 SK이노베이션은 사우디아라비아 석유화학업체 사빅과 고성능 플라스틱 ‘넥슬렌’(메탈로센 폴리에틸렌) 생산을 위한 합작사 ‘사빅SK넥슬렌컴퍼니’를 설립했다. 아람코는 최근 “2020년까지 사빅 지분 70%를 인수하겠다”고 밝혔다. 사빅 인수가 마무리되면 SK이노베이션과 아람코 역시 지분이 엮일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한국 건설업계의 중동 진출 붐이 일었을 때 국내 건설업체들은 아람코가 발주한 송유관 공사를 따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아람코는 최근에도 현대중공업, 사우디 국영 해운회사 바흐리(Bahri) 및 람프렐(Lamprell) 등과 함께 2021년까지 사우디 동부에 약 150만 평 규모의 합작 조선소를 건립하는 계약을 맺었다. 또한 ‘탈(脫)석유’를 기치로 내건 사우디 정부의 국가 개혁 프로그램 ‘비전 2030’에도 향후 20년간 원자력발전소 16기를 짓는다는 계획이 담겼다. 사우디 정부는 첫 사업으로 올해 말까지 원전 두 곳을 지을 계획이며 한국, 미국, 러시아가 수주 경쟁을 펼치고 있다. 사우디 시장이 한국 건설업계 및 원자력업계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안창용 주사우디 한국대사관 상무관은 “아람코 관계자들을 만나면 늘 에쓰오일을 투자 성공 사례로 언급한다. 최근 현대오일뱅크 지분을 사들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며 “한국 시장에 대한 관심이 큰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한국을 아시아 거점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했다.

카이로=서동일 특파원 dong@donga.com
#아람코#사우디아라비아#세계 석유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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