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과의 전쟁에 대비해 중동에 미국 항공모함 전단이 증파되는 등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던 21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국무·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이 함께 의회를 찾았다. 최근 중동의 민간 선박과 송유시설을 겨냥한 공격의 배후가 이란이라는 내용의 비공개 브리핑을 받은 공화당과 민주당 의원들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공화당은 항모전단, 전략폭격기, 패트리엇 미사일 포대 등의 급파 조치를 지지한 반면 민주당은 이란을 공격하기 위한 정보 조작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불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공화당의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플로리다)은 브리핑 분위기를 묻는 취재진에 “매우 간단한 방정식이다. 이란이 공격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고, 만약 이란이 공격한다면 대통령은 그들에게 ‘드라카리스(dracarys)’를 할 것이다”라고 대답해 화제가 됐다.
드라카리스는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에서 ‘용의 어머니’ 대너리스 타르가르옌이 용에게 불을 뿜으라고 지시할 때 사용하는 발라리아 언어이다. 드라마를 모른다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미 정치권에선 안보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서슴지 않고 사용한다. 메시지의 주목도를 높이고 뜻도 명확해진다는 기대효과 때문이다. ● 워싱턴 권력 다툼과 빼닮은 드라마
2011년 첫 방영 이후 8년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드라마 왕좌의 게임이 19일(현지 시간·한국은 24일 오후 11시 방영)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가상 대륙 ‘웨스테로스’를 통치하는 ‘철 왕좌(iron throne)’를 차지하기 위한 7개 가문의 사투를 다룬 이 드라마를 미국에선 현실 정치의 복사판으로 여긴다.
2016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트럼프 대통령과 맞붙었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지난달 뉴욕 강연회에서 ‘어떤 드라마가 현실 정치세계와 가까운가’라는 질문에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왕좌의 게임이 그렇다”라고 밝혔을 정도다. 미 의회전문매체 ‘더힐’도 19일 기사에서 “왕좌의 게임이 미국 정치인들과 수도를 장악했다”고 평가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2016년까지만 해도 왕좌의 게임은 ‘블루 스테이트’(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주)에서 인기를 끌었다. 이에 대해 미 인터넷매체 데일리비스트는 15일자 보도에서 “왕좌의 게임이 끊임없이 부패 문제를 비판해 왔고, 시청자층이 젊은층에 편중된 탓”이라고 분석했다. 드라마 원작인 판타지 장편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의 저자 조지 R R 마틴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을 드라마 속 폭군인 조프리에 빗대며 “나는 조프리가 현재 미국의 왕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하며 반트럼프 성향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2020년 대선에 도전하는 민주당 대선 후보로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을 지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 가장 패러디 많이 활용하는 정치인은 트럼프 대통령
하지만 왕좌의 게임을 모르면 학교나 직장에서 소외될 정도로 국민적 인기를 누리면서 민주당 지지자들이 선호하는 드라마라는 평가는 무의미해졌다. 더힐은 “미국의 여야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할 목적으로 왕좌의 게임 속 문화적 어휘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드라마 원작자 마틴이 가장 싫어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북한 등 외교정책에서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대사를 많이 빌려다 쓴다. 올해 1월 2일 신년 첫 백악관 각료회의를 주재할 때 책상에 ‘제재가 오고 있다(SANCTIONS ARE COMING)’는 문구의 포스터를 펼쳐놓은 게 대표적이다. 이는 ‘겨울이 오고 있다(WINTER IS COMING)’ 드라마 속 문구를 변용한 것이다. 이는 스타크 가문의 가훈으로 닥쳐올 어려움에 대비하자는 뜻이다.
백악관 포스터가 공개됐을 당시 어두운 분위기와 글씨체가 왕좌의 게임 포스터와 매우 닮았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북한의 경제발전을 돕겠다는 메시지를 내놨지만 포스터를 통해 제재 압박 완화 불가 입장을 내비친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대이란 경제 제재가 발효될 때 ‘제재가 오고 있다’는 포스터를 처음 사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멕시코 국경장벽 건설과 러시아의 미 대선 개입 의혹 수사 같은 문제가 불거졌을 때에도 왕좌의 게임을 여러 차례 패러디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월 3일 인스타그램에 ‘장벽이 오고 있다(THE WALL IS COMING)’라는 문구와 함께 국경장벽이 그려진 포스터 이미지를 올렸다. 문구 위에는 정면을 노려보는 자신의 얼굴을 큼지막하게 배치해 불법 이민자들을 막기 위한 국경장벽 건설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러시아 스캔들’ 의혹에 관한 특검 수사 보고서 편집본 공개 관련 기자회견 직후에도 왕좌의 게임 이미지에 ‘게임 오버(GAME OVER)’라는 글자를 적어 자신의 승리를 자랑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배경에 검은색 코트를 입은 자신의 뒷모습 사진을 배치한 이미지 상단에는 ‘공모도, 사법 방해도 없었다(NO COLLUSION. NO OBSTRUCTION)’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무차별 차용에 부담을 느낀 듯 드라마 제작사인 HBO는 같은 날 “왕좌의 게임에 대한 열정은 이해하지만 우리의 지식재산권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HBO는 ‘제재가 오고 있다’ 포스터가 등장한 지난해 11월에도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 드라마 패러디하다 역풍을 맞기도
민주당 정치인들과 방송 진행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을 왕좌의 게임 속 폭군에 비유하길 즐긴다. 왕좌의 게임 시즌1부터 시즌8까지 철 왕좌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좋은 왕은 없었다.
민주당의 하킴 제프리스 하원의원(뉴욕)은 지난달 30일 러시아 스캔들 특검 수사를 방해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해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왕이라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며 “여기는 웨스테로스(왕좌의 게임 속 가상 대륙)가 아니라 워싱턴”이라고 비판했다. ‘더 레이트 레이트 쇼(The Late Late Show)’ 진행자인 제임스 코든은 이달 13일 중국산 상품에 대한 관세 인상 결정으로 격화된 미중 무역전쟁에 반대한다면서 “나는 이번 무역전쟁이 트럼프가 용의 등에 올라타서 경제 전체를 불태우는 것으로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우려 섞인 비판을 가했다.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매사추세츠)은 왕좌의 게임을 활용한 정치적 메시지를 내보내길 즐기는 대표적인 정치인. 그는 지난달 ‘세계는 보다 적은 서세이 라니스터들을 필요로 한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권력욕에 사로잡힌 여왕(서세이 라니스터)을 비판하며 소득 불평등 문제를 부각시켰다. 하지만 같은 칼럼에서 ‘용의 어머니’ 대너리스 타르가르옌을 가장 좋아한다고 밝혔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대너리스가 이후 드라마 전개 과정에서 용의 등에 올라타고 무고한 수천 명의 시민을 죽이는 악당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19일 마지막 회가 방영되기 직전 “그녀는 좋은 선택이 아니다”라며 지지를 철회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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