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영국 총리가 될 영국 집권 보수당 대표 경선이 보리스 존슨 전 외교장관(55)과 제러미 헌트 현 장관(53)의 대결로 압축됐다. 13∼20일 장장 5차례의 투표에서 내내 독보적 지지율 1위를 고수한 존슨 전 장관이 다음 달 당 대표 겸 총리가 되면 또 하나의 기록이 탄생한다. 바로 명문 사립학교 이튼 칼리지를 졸업한 20번째 영국 총리란 기록이다.
18세기 초 조지 1세는 “군주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 원칙을 확립했다. 이후 국왕 대신 총리가 실권을 잡았고 초대 로버트 월폴부터 현 테리사 메이까지 총 54명의 총리가 등장했다. 이 54명의 35.2%인 19명이 이튼 졸업생이다. 역시 이튼 출신인 존슨까지 총리에 오르면 비율은 36.4%로 늘어난다. 이 학교는 어떻게 영국 엘리트의 산실이 됐을까.
○ 글래드스턴·밸푸어·캐머런 등 배출
이튼 칼리지는 수도 런던에서 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 버크셔주에 있다. 만 13∼18세 남학생을 교육하는 중등 교육기관으로 1440년 헨리 6세가 가난한 학생 및 소년 성가대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했다. ‘자선’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 약 580년 후 총리 19명을 배출한 ‘귀족 학교’가 됐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영국 사회에서 ‘이튼’ 브랜드는 단순한 명문 학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역사를 수놓은 여러 인물을 배출했을 뿐 아니라 뛰어난 지성과 남다른 애국심으로 근대 영국의 기초를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튼 학생을 뜻하는 단어 ‘이토니언(Etonian)’이 옥스퍼드 사전에 올랐을 정도다.
이 학교 안에는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숨진 1900여 명의 이토니언을 기리는 벽이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우선시하는 학풍에 따라 당시 학생들은 망설임 없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엉덩이를 뒤로 길게 덮는 서양 전통 예복인 연미복을 교복으로 입을 만큼 전통을 중시하는 문화도 있다.
교훈은 ‘남의 약점을 이용하지 말라. 비굴하지 않은 사람이 되라. 공적인 일에 용기 있게 나서라’다. 마지막 교훈을 반영하듯 수많은 정치인이 이튼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총리 중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무려 네 차례 총리를 지내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기틀을 만든 윌리엄 글래드스턴, 아일랜드 합병 등을 단행한 ‘나폴레옹의 맞수’ 윌리엄 피트,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정착을 허용한 ‘밸푸어 선언’의 아서 밸푸어 등이 유명하다. 수에즈 전쟁을 일으켰다 퇴각해 대영제국의 쇠락을 알린 앤서니 이든,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혼란을 낳은 데이비드 캐머런 등은 퇴임 후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 예술·학계 파워 막강… 왕실 남성도 동문
문화예술계에도 이튼 파워가 대단하다. 문학계에서는 소설 ‘동물농장’ ‘1984’의 작가 조지 오웰, ‘멋진 신세계’를 집필한 올더스 헉슬리, 영화 ‘007’ 시리즈의 원작자 이언 플레밍 등이 이튼을 거쳤다.
영화계에서는 ‘어벤져스’ 시리즈의 ‘로키’로 유명한 톰 히들스턴, ‘사랑에 대한 모든 것’으로 2014년 미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에디 레드메인, 미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 ‘홈랜드’의 주인공 데이미언 루이스, 미드 ‘닥터 하우스’의 주인공 휴 로리, 미드 ‘어페어’의 주인공 도미닉 웨스트 등 쟁쟁한 배우들이 동문이다.
학계에서는 고전 경제학의 대부 존 메이너드 케인스, ‘십자군의 역사’를 쓴 역사학자 스티븐 런시먼, ‘일정 온도에서 기체의 압력과 부피는 반비례한다’는 ‘보일의 법칙’을 만든 로버트 보일, ‘음의 이론(Theory of Sound)’으로 유명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존 레일리 등을 배출했다.
왕실 남성도 대부분 이튼과 연을 맺었다. 설립자가 국왕인 데다 학교 인근에 윈저성이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손자인 윌리엄 왕세손과 동생 해리 왕손, 여왕의 사촌동생 글로스터 공작과 켄트 공작, 두 공작의 아들들도 모두 이튼을 졸업했다.
1760년부터 1820년까지 무려 60년간 집권한 조지 3세는 윈저성에서 머물 때 종종 이튼을 찾아 학생들과 환담을 즐겼다. 이에 이튼에서는 지금도 조지 3세의 생일인 매년 6월 4일 그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타국 왕실 인사도 많다. 태국 최초의 입헌 군주 쁘라차티뽁 라마 7세,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3세도 이튼을 졸업했다. 2008∼2011년 태국 최연소 총리를 지낸 아피싯 웨차치와 전 총리도 동문이다.
○ 연 학비 약 6300만 원… 입학 기준은 아무도 몰라
학교 웹사이트 등에 따르면 이튼의 전체 재학생은 약 1300명이다. 전원 기숙 생활을 하며 한 해 졸업생은 통상 270명 정도다. 매년 9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 이어지는 연간 교육 과정은 3학기로 구성된다. 각 학기를 부르는 독특한 이름도 있다. 9월 초∼12월 중순은 ‘미클머스’, 1월 중순부터 3월 말은 ‘렌트’, 4월 말부터 6월 말 혹은 7월 초를 ‘서머’로 부른다. 입학 신청 및 허가는 ‘미클머스’ 때만 이뤄진다.
이튼이 밝힌 2019∼2020년 기준 학기당 학비는 1만4167파운드(약 2092만 원). 1년이 3학기임을 감안할 때 연 학비만 약 6300만 원이다. 그래도 이를 마다하는 사람이 없다. 졸업생 중 약 3분의 1이 최고 명문 ‘옥스브리지’(옥스퍼드+케임브리지)에 입학할 정도로 명문대 진학이 사실상 보장돼 있기 때문이다. 옥스브리지를 가지 않은 학생들도 주로 런던정경대(LSE), 임페리얼칼리지, 에든버러대, 워릭대, 맨체스터대, 브리스톨대, 글래스고대 등 영국 20위권 내 대학에 진학한다. 이들 학교는 영국판 ‘아이비리그’로도 불리는 ‘러셀 그룹’을 구성한다.
게다가 자녀들에게 훗날 영국 엘리트가 될 사람들끼리의 인적 네트워크를 미리 쌓아 주려는 부모들 성화로 입학 경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과거 일부 열성 부모는 자녀가 태어나자마자 입학 대기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지만 최근에는 입학 약 2, 3년 전에 지원하는 경향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학을 원하는 학생은 한국 생활기록부에 해당하는 ‘학교 기록(school report)’부터 제출해야 한다. 지원자의 성적, 관심 분야, 재능 등을 대부분 이 문서로 평가한다. 이 외 언어, 수리, 인지 능력 등을 평가하는 별도 시험 및 인터뷰도 치른다. 다만 학교 측은 구체적 선발 기준과 입학 경쟁률을 일절 밝히지 않고 있다. 왜 여학생을 뽑지 않느냐는 항의성 질문에는 ‘전통’이라는 말로 피해 버린다. 다만 부유한 명문가 자녀만 입학할 수 있을 것이란 선입견을 의식한 듯 웹사이트에 “부모의 경제적 능력은 입학 고려 사안이 아니다. 재학생의 약 21%가 장학금을 받는다”라고 명시했다.
○ 선거 전략, 이미지 연출에 능해
이튼 출신들은 왜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낼까. 단순히 타고난 부와 인적 네트워크 때문이라고 보긴 어렵다. 전문가들은 어렸을 때부터 뼛속까지 익힌 정치 감각, 타인의 호감을 유발하는 화술과 태도 등을 이유로 꼽는다. 자신의 재학 경험을 ‘이튼인 되기의 중요성(The Importance of Being Eton)’이란 책으로 펴낸 다큐멘터리 감독 겸 언론인 닉 프레이저에 따르면 이튼 학생들은 어려서부터 학교 내 수많은 소모임에서 서로를 뽑고 뽑히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표를 얻기 위해 속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매력적으로 행동하는 법부터 배우게 된다는 의미다. 존 해리스 가디언 칼럼니스트는 1980년대 이튼을 다닌 한 졸업생을 인용해 “이토니언들은 자신이 영국을 움직이게 될 것을 육감적으로 안다”고 했다.
그 대표 사례가 존슨 전 장관이다. 그는 이튼과 옥스퍼드를 거쳤고 부친은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및 세계은행 간부 등을 지냈다. 부유한 변호사 외조부는 집안의 재정적 기둥이었다. 하지만 정치인 존슨을 보면서 이런 느낌을 받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소탈한 ‘동네 아저씨’ 이미지로 유권자들에게 어필한다. 의원 시절 흐트러진 더벅머리로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던 모습은 아직도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호주 ABC뉴스는 “노숙인 같은 머리, 후줄근한 옷차림은 조심스레 ‘연출’된 결과물”이라며 “이런 모습이 상류층 정치인에게 반감을 갖는 유권자들의 환심을 샀다”고 분석했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폐쇄된 공간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또래보다 빨리 어른인 척 행동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과도한 경쟁과 괴롭힘이 일상화된 상황 속에서 생존을 위한 합종연횡과 배신에 익숙해지고 이것이 훗날 피 튀기는 정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일종의 무기로 작용한다는 의미다.
○ 이튼이 브렉시트 대혼란 원인?
이튼을 비롯해 윈스턴 처칠 전 총리를 배출한 해로, 웨스트민스터, 덜위치, 말버러 등 명문 사립 기숙학교와 이를 졸업한 정치인에 대한 반감도 상당하다. 특히 2016년 6월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 때부터 3년간 영국을 대혼돈에 빠뜨린 주역 대부분이 사립학교 출신이어서 이런 비판이 더욱 커지고 있다.
2015년 총선을 앞두고 집권 연장을 위해 돌연 브렉시트 카드를 꺼낸 캐머런 전 총리, 이튼 및 옥스퍼드 동문인 캐머런의 총리 사퇴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존슨 전 장관, 보수당 내 브렉시트 강경파 모임 유럽연구단체(ERG) 대표이자 메이 총리의 브렉시트 합의안에 사사건건 딴죽을 걸어온 제이컵 리스모그 의원이 대표적이다.
특히 채널4 방송은 리스모그 의원이 브렉시트 혼란으로 파운드 가치가 떨어질 때 이에 베팅해 무려 700만 파운드(약 105억 원)의 시세차익을 봤다고 보도해 국민 공분을 자아냈다. 가디언에 따르면 미하엘 로트 독일 외교부 유럽차관은 “영국 내각의 90%는 노동자의 삶을 모른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 사립학교와 명문대를 나온 정치인들이 브렉시트 대혼란에 책임이 있다”고 꼬집었다.
14일 이 매체는 존슨 전 장관을 겨냥해 ‘또 다른 이튼 출신 총리 등극에 맞서 사립학교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기사도 내보냈다. ‘상류층 소년: 사립학교가 어떻게 영국을 망치는가’를 쓴 작가 로버트 버카이크에 따르면 영국 전체 학생 중 사립학교 재학생은 7%에 불과하지만 이들은 고위 법관의 74%, 군 고위직의 71%, 최고위 외교관 및 상원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보수당 의원 45%도 사립학교 출신이다.
가디언은 “1970년대 후 지금까지 영국 자산 불평등은 배로 늘었고, 수백만 명이 이튼 같은 사립학교의 존재도 모른 채 무덤으로 간다. 극소수만이 요직을 독차지하는데 왜 제1야당 노동당은 사립학교의 영향력을 억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가”라며 엘리트 중심의 국가 체계를 바꾸자고 주장했다.
해리스 칼럼니스트는 “소수 정예 사립학교에서 자신감을 키운 소년들은 ‘옥스브리지’로 향하는 직진도로를 타면서 오만함과 우월감에 빠진다. 반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능력은 점점 떨어져 사립 출신 엘리트들이 이라크전, 세계 금융위기 같은 ‘모험’을 즐겼다”고 일갈했다. 존슨 전 장관이 총리가 되면 이런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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