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공산주의를 무너뜨린 중유럽 국가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는 23일(현지시간) 약 25만명의 군중이 모여 안드레이 바비시(64) 총리 퇴진을 요구했다. 1989년 이곳에서 공산당 정권을 무너뜨린 ‘벨벳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다.
시위에 참여한 시몬 바치(31)는 연단에 올라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민주주의를 지켜왔으나 바비시 총리는 이를 파괴하려 한다”며 “우리는 법에 따른 통치가 이뤄지지 않던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치는 반중 시위 중인 홍콩 시위대가 보낸 격려의 편지를 낭독하기도 했다.
지난 4월 이후 5번째 시위를 이어가고 있는 체코의 시위는 바비시 총리의 비리 의혹에서 촉발됐다.
대기업 총수 출신인 바비시 총리는 2007~2008년 EU 보조금 약 200만유로(약 26억원)를 빼돌려 자신의 호텔 사업에 활용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4월 경찰은 바비시 총리에 10년 이하의 징역을 묻는 사기 혐의를 물어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바비시 총리는 즉각 법무장관을 해임하고 자신의 측근을 이 자리에 앉히며 강경 대응하고 나섰다. 또 현재의 시위는 “반대파의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시위는 단순히 비리를 저지른 지도자에 대한 저항으로 설명하기 힘들다고 WSJ은 설명했다. 장기적인 흐름으로 봤을 때 현재의 시위는 중유럽이 직면한 ‘독재화’의 움직임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주변국인 헝가리의 독재화 움직임은 체코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헝가리는 민주 국가지만 개인적 자유는 제한돼야 한다”는 ‘자유 제한적 민주주의’를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독재 정책을 펼치고 있다. 사위인 이슈트반 티보르가 소유한 회사에 EU기금을 투자하는 황당한 결정을 내려 EU 부패감독청(OLAF)의 경고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사법부는 물론 언론의 주요 요직을 오르반 총리의 측근이 차지하고 있어 헝가리에서는 그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23일 체코에서 시위를 이끈 벤저민 롤은 “우리와 가까운 헝가리의 민주주의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며 “정말 위험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체코와 국경을 마주한 루마니아는 최근 몇 년간의 시위 끝에 여당 사회민주당(PSD)의 대표이자 2012~2014년까지 총리는 지낸 리비우 드라그네아 전 총리를 끌어내렸다.
루마니아 최고 법원은 지난달 ‘총리 위 실세’를 자처하던 드라그네아 대표에 유죄를 판결하고 3년 6개월형을 확정했다. 드라그네아 대표는 2008∼2010년에 당직자 2명을 가족복지 담당 공무원으로 허위 채용해 급여를 수령하게 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싸움은 쉽지 않았다. 드라그네아 전 총리는 반부패청(DNA)을 비롯한 검찰기구의 권한을 제한하고 부패사범에 대한 정부의 사면권을 확대하는 ‘반부패법’을 수정하는 사법제도 개편에 나서며 자신을 적극 옹호했다.
시민들은 ‘철의 장막’ 붕괴 이후 가장 큰 시위를 벌이며 드라그네아 대표에 저항했다. 드라그네아 대표에 징역형이 선고됐을 때는 현지 매체들 마저 “생각지도 못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슬로바키아에서는 지난해 정부 부패를 조사하던 기자와 그의 여자친구가 살해된 채 발견되며 크고 작은 시위가 벌어졌다. 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는 여론이 악화되자 결국 사임했고 시민들은 그의 후임으로 환경운동가이자 변호사인 주자나 차푸토바를 당선시켰다.
그러나 체코의 시위는 성공적으로 끝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 팽배하다. 도심의 중장년층 유권자들 사이에서 바비시 총리에 대한 인기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지난 달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바비시 총리의 중도주의 정당인 긍정당(ANO 2011)은 21.2%의 득표하며 1위에 올랐다. 야당은 이번 주 총리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치를 예정이지만 승리할 만큼 충분한 표는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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