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역의 보루 격인 세계무역기구(WTO)가 무력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이 WTO 분쟁해결기구의 최종심인 상소기구 위원 선임에 응하지 않고 있는 데다 중국 한국 등을 개발도상국 지위에서 빼지 않으면 미 무역대표부(USTR) 단독으로라도 개도국 대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1995년 출범한 WTO는 24년 동안 다자주의 원칙에 따라 상품, 서비스, 지식재산권을 포괄하는 교역 자유화를 추진해 왔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자국 중심주의에 본래 기능이 무력화될 위기에 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은 상소기구 위원 선임 반대와 개도국 대우 축소라는 양날의 칼로 WTO를 미국 입맛에 맞도록 바꾸고 있다. 주로 중국을 타깃으로 한 것이지만 이 과정에서 한국 등 무역의존도가 큰 나라에 불똥이 튀고 있다. 한국으로선 일본의 경제 보복에 미국의 개입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미국의 WTO 흔들기에 다른 나라와 공동보조를 취하며 맞서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WTO의 무역분쟁 조정과 해결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은 7명으로 구성된 상소기구가 맡는다. 현재 인도, 미국, 중국 출신 위원 3명만 남아있다. 결원인 4명의 후임자는 미국의 반대로 충원이 안 되고 있다. 12월 10일이면 남아 있는 인도, 미국 출신 위원 임기도 끝난다. 내년 11월 30일에 임기가 만료되는 중국 출신 위원 1명만 남는다. 위원 3명이 1건을 심리하는 구조여서 올해 말 이후 상소기구 기능이 정지된다. WTO는 회원국 만장일치로 의사결정이 이뤄지게 돼 있어 미국이 반대하면 상소기구 위원을 선임할 수 없다.
미국은 위원 선임을 반대하면서 “WTO 규범이 불합리하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은 중국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이 2001년 WTO 가입 이후 국제교역에서 가장 큰 수혜를 받은 덕분이라는 시각이다. 특히 미국은 자국 변호사들이 포진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1심 패널에서 승소했다가 상급심에서 패소하는 경우가 늘자 상소기구를 문제 삼았다.
한국이 일본의 수출 규제를 WTO에 제소할 경우 1심 격인 패널 절차는 일반적으로 1년가량 소요된다. 한일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인 만큼 어느 쪽이 패소하더라도 상소기구에 2심이자 최종심을 청구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상소위원 선임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절차를 진행할 상소위원이 부족하다.
한국은 미국이 제기하는 개도국 지위 문제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미국은 올해 1월부터는 부자 나라들이 개도국 지위를 이용해 특혜를 누리고 있다면서 개도국 기준을 다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당장 미국이 강제로 개도국 지위를 박탈할 수 없다고 해도 향후 WTO 농업 협상 과정에서 반대하면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
상소기구의 판결을 회원국이 따르지 않아도 제재 방안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미국은 2013년 2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수출한 세탁기에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다가 2016년 9월 WTO에서 패소했지만 이후에도 계속 높은 관세를 매겼다. 결국 올해 2월 한국이 WTO에 보복관세를 신청하자 미국은 3월 말에야 반덤핑 관세를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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